서양화가 이영박‥‘2016한국구상대제전’초대전, 10월14~20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대여섯 살 즈음 이었나 보다. 완만하게 휘어진 산자락 옆 얕은 개울에 노랗고 붉은 둥근달이, 떠오른 건지 흘러가는 것인지 넋을 놓고 들여다볼 즈음 저기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무명옷을 입은 어머니가 지친 목소리로 반가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한걸음 달려갔을 때 저녁바람에 요란스럽게 서걱거리며 하얗게 너울거리던 억새꽃 군무(群舞). “가을은 안개 낀 보도의 창 너머 있다. 잠든 이웃들을 잠들게 하고 깨어난 자의 뒷덜미를 끌고 가는 어두운 손. 미로의 창틈마다 스며드는 햇살을 거두며 가을이 녹슨 수레바퀴를 굴릴 때 가을 황혼 황야에서 문득 마주치는 나의 그림자.”<오세영 시, 가을4, 문학동네>

이별과 기다림의 흔적이 저렇듯 간절할 것인가. 오름 능선에 앉아 바라본다. 무작정 해풍에 흔들리는 은빛억새는 휘몰이 장단처럼 쓰러질 듯 드러누웠다가 다시 기적처럼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격한 울음을 토해내듯 수왕-수왕 소리를 냈다. 문득 생의 질곡을 통과하는 시련의 길목이 이런 것인가 하여, 울컥 뜨거운 눈물이 솟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움츠린 어깨를 간신히 펴고 바라본 오오 저 잠자듯 고요한 바다여! 억새를 키워낸 담갈색 대지 그 켜켜이 쌓인 거무스름한 퇴적의 흔적은 두터운 질감의 엄숙한 힘으로 시선을 끌어당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세찬바람에 흔들려도 생명근원의 중심을 잡아주는 튼실한 버팀목일진데….

연륜의 깊이 그 단순함

가을햇살이 눈부시게 맑은 날이었다. 지난해 이맘쯤 서울 혜화동에서 화백과 만나 화도(畫道)에 대한 이야기를 장시간 나눈 이후 꼭 1년만이었다. “요즈음 아내와 ‘북서울꿈의숲’을 걷는 산책이 새록새록 즐겁다. 작업에 대한 열망은 젊은 날보다 깊어지는 느낌이 있다. 고요한 울림이 더 크다는 것과 사물을 대하는 관조 또 스스로에 대해 너그러움을 체화하는 성숙 같은 것이 아닐까”라고 근황을 전했다. 어느덧 고희(古稀)에 접어 든 사색적 화풍(畫風)을 그려온 화백에게서 많은 것을 비워내고 내려놓은 맑은 정신의 간결함이 느껴졌다.

이영박 작가는 지난 1993년 ‘제12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거머쥐며 화단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수상작 ‘삶-맑음 그리고 비-1’은 상처를 꿰맨 자국같이 낡은 슬레이트지붕 위에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검게 그을린 양철 굴뚝 너머 자그마하게 보이는 지하철 역 표시가 어딘지를 암시하는 그림이다. 저마다 생의 자국을 떠올리게 하는 화폭은 깊은 감명으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이후 작품구상에 꽤 오랜 고뇌의 시간을 보낸 그가 1998년 첫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작품은 낙동강 하구 을숙도의 억새와 풍광이었다. 가없는 시간의 흔적 앞 대자연의 웅혼함과 자아의 발자취를 어렴풋 찾아가는 시적 운율과 일생(一生)이라는 맥박의 고동을 느끼게 하는 울림으로 관람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작품들은 가히 폭발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한편 이영박 화백은 오는 10월14~20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2016한국구상대제전’에서 그의 열여덟 번째 개인전을 갖는다. 이번에는 특히 제주도 억새꽃을 주제로 한 작품을 포함해 총15여 점을 선보이는데 이전의 존재본질을 일깨우는 회화정서와 맞닿아 있다. 특히 그동안 컬러풀한 작업을 해 왔다면 최근작에서는 단색조를 많이 가미한 화풍을 드러내 보인다. “나이 듦과 연륜의 깊이일까. 아마도 복잡한 색상보다 한국적인 색깔의 억새처럼 단순화시킨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것 같다. 그동안 제주도를 여러 번 방문했지만 올해는 성산일출봉, 삼방산이 보이는 오름 현지서 붓을 들어 바다와 바람에 나부끼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하얀 억새꽃에서 세월의 향기를 담아왔다”라고 밝혔다.

권동철 @hankooki.com

#사진캡션

1=가을 속으로(제주도), 112.1×162.2㎝ oil on canvas, 2016

2=97.0×130.3㎝

3=서양화가 이영박



미술전문기자 dckewon5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