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허미자…‘지나가는 바람에 말 걸기’개인전, 12월 4일까지 자하미술관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 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 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 다오.” <기형도 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 문학과 지성사>

가만히 있는가 하여 조금 다가서면 가늘게 흔들린다. 여린 듯 아픔이, 무거움 짐을 내려놓은 평안,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수줍게 응시하는 어떤 끌림 그리고 여백 사이 말간 하늘과 햇빛이 재회한다.

에릭사티(Erik satie)의 ‘짐노페디(Gymnopedie1번)’ 피아노선율이 온화한 태도로 인사를 준다. 나뭇가지는 잎들과 작별을 고하며 소중하게 씨앗을 껴안고 대지로 돌아갈 분신의 볼에 입맞춤하며 순환과 질서와 섭리에 대해 진솔한 기도를 올리려는 참이다. 한 줄기 바람이 가지를 흔든다. 무채색 허공은 무덤덤하게 겨울 찬 공기를 매만지는 저녁, 나무는 한 해의 흔적을 조용히 뒤적이며 얼마나 분주하게 달려왔던가를 떠올린다. 봄날의 핑크빛 설렘, 여름해변 상큼한 머릿결의 나부낌, 가을의 불같이 타오르던 단풍잎 그리고 겨울날 회귀의 선상에서 떠오르는 존재의미들….

화면엔 회상과 현재, 동경과 몽상 또 여명과 황혼의 여정이 아련히 배어난다. 비와 노래, 바람처럼 흘러가는 생의 영상이 단지 가지 하나 나뭇잎 몇으로도 우주의 심오한 비의를 묘사해 내고 있다. 그 간결한 감각의 세련미가 심상을 건드린다. 작가는 이렇게 전했다. “어느 해 겨울날이었다. 오래 된 아름드리 오동나무아래서 위를 쳐다본 순간 어디에서도 그처럼 강렬하게 느낄 수 없었던 선과 점과 새롭게 열리는 경이로운 영감의 풍경이 다가왔다. 정말 멋있었다. 가슴으로 밀려 든 그때의 회화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소재는 뻗어 나온 잔가지와 방울 같은 까만 열매지만 그 너머의 자유로움, 전율, 깨달음의 세계를 담아내고 싶었다.”

자유로움의 다채로운 색감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인근서 버스를 타고 자하문터널을 지나자마자 내렸다. 인근 서울미술관 앞을 지나 경사진 길을 산책하듯 걸어 올랐다. 인왕산 아래 자리한 자하미술관에 도착하니 정오의 햇살이 잔디에 따사롭게 내려앉았다. 산새소리 들리는 벤치에서 작가와 인터뷰했다.

그는 지난 1984년 관훈미술관 첫 개인전에서 빛과 어둠 등을 표현한 ‘무제’ 추상작품을 발표했고 90년대에 들어와 블랙계열 작업에서부터 블루, 화이트계열로 오랫동안 작업변모를 보여 왔다. 이후 2005년부터 조금씩 컬러풀한 색채를 보이다 최근 작품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아크릴, 안료, 겔미디움, 먹 등 재료를 폭넓게 운용하는데 “내면의 흐름을 움켜쥐었다가 놓았다고나 할까. 이전에는 내가 뭔가를 해야 되겠다는 집착 같은 생각이 강했다면 지금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둔다. 아마도 그런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다채로운 색감이 나오는 것 같다”라고 했다.

허미자 작가는 성신여자대학교 서양화과 및 동 일반대학원 석사졸업 했다. 갤러리 팔레 드 서울, 롯데호텔갤러리(서울 소공동) 등에서 개인전을 17회 가졌다. 11월11~12월4일까지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소재, 자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는 신작과 그동안 아껴둔 100호, 200호 대작을 비롯하여 20점을 선보이고 있다.

화업 33년의 그에게 화가의 길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림을 그려야 만이 사는 것 같다. 그래야 해소가 되기 때문이다. 감성을 묵혔다가 한 순간에 뻥 나오는 작업스타일이라 붓을 들면 대부분 끝장을 보게 되는데 그런 과정에서 더 치열하게 나를 건드리게 되고 새로운 것을 느끼게 된다.”

권동철 @hankooki.com

#작품캡션

-Untitled, 194×130.5㎝, Mixed Media, 2014

-(왼쪽)194×130㎝, 2015 (오른쪽)194×130㎝

-허미자 작가



권동철 미술전문기자 dckeown5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