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이종민… ‘THE 仁旺山 Projet’전 참여, 4월26~5월21일, 겸재정선미술관

“송덕문도 아름다운 시구절도 전원가든이란 간판도 묘비명도 부처님도 파지 말자/돌에는 세필 가랑비 바람의 획 육필의 눈보라 세월 친 청이끼/덧씌울 문장 없다 돌엔 부드러운 것들이 이미 써놓은 탄탄한 문장 가득하니/돌엔 돌은 읽기만 하고 뾰족한 쇠끝 대지 말자”<함민복 詩, 돌에, 문학세계사 刊>

겨울과 봄, 사이 즈음이다. 중첩된 절기에 맞물려 있는 간극에 도드라지는 운동성과 엿보이는 생명성이 미묘하게 겸허한 비움의 마음으로 인도한다. 자주 다니는 뒷동산 오솔길을 걷다 살갗을 스치는 새봄의, 계절이 온다는 확신의 독백이 저절로 나오는 온기가 전해진다. 이웃하고 있는 집들을 이어주는 구불한 길을 따라 가다 보면 화면의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또 옆으로 그렇게 고저장단(高低長短)이 연결되어 있다. 산도 그런 기세의 흐름을 타듯 오르고 내려가는 길이, 트여있다.

작품명제 ‘봉천’은 특정 동네이름이라기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 마을의 대명사다. 말하자면 산 밑에 있는 하늘에 가까운 동네는 모두 봉천이다. 작품배경 인왕산에 작가가 여행에서 체득한 여수, 홍천, 개미마을 등을 병치(倂置)시켰다. 시간과 공간이 각기 다르지만 자신이 깨달은 심상의 맛을 녹여낸 연작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전통산수화가 어느 한 공간의 고정된 찰나를 그렸다면 나는 체험한 시간의 중첩을 그린다. 실경산수같이 주관과 객관의 합일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인 것에 더 관심이 있다. 화면의 노골 같은 등골의 오래된 산은 세월의 축적이 만든 주름들을 기세로 풀어냈다. 이를테면 바위가 있으면 형상이 아니라 가랑비라든지 바람이 지나간 자국이 바위의 주름이자 그것들이 남긴 흔적의 사소한 부드러움이라는 인식에 주목한다. ‘바위를 닮았네’ 보다 구김살의 근원에 더 접근하려는 것이다.”

지역이 다른 현존공간의 병치

작가는 1999년 첫 개인전부터 벽화의 대표적 기법인 프레스코(fresco) 작업을 해 오고 있다. 자작나무 합판에 스크래치를 낸 다음 황토를 입히면 쫙쫙 갈라지고 반복해 그 위에 석회를 올리면서 안료와 분채를 이용하여 채색한다. 흘러내리는 변화 많은 과정인데 우연성까지 끌어안으며 나뭇잎이 해마다 쌓여 퇴화된 것처럼 채색 층은 깊은 시간성을 전한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날카로운 칼날의 자취를 이용해 이미지를 그려주고 벗겨내기도 하고 색을 올리는 등의 작업을 이어간다. 그러한 후에, 엄동설한 서슬 퍼런 칼날 같은 또 시래기처럼 응축된 켜켜이 묵은 겨울 산의 장엄한 한 줄기 바람이 관람의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어릴 적, 집에 흙벽이 있었다. 그곳에 색동풍선껌으로 1년 내내 붙이며 그림을 그렸다. 그것이 벽화의 시작이었다”는 이종민 작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학고재, 갤러리 아트링크 등에서 개인전을 아홉 번 가졌다.

4월 26일부터 5월 21일까지 열리고 있는 겸재정선미술관개관8주년기념특별기획전 ‘THE 仁旺山 Projet(더 인왕산 프로젝트)’전(展)에 참여, 전시하고 있다.

그는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서 태어나 동네 뒷산인 인왕산 아래서 뛰어놀았다. “누구나 그러하듯, 굳이 그곳에 가지 않아도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는가에 따라 가슴이 훗훗해지는 것은 거기서 태어나고 어렸을 때부터 체득된 결과의 산물일 것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산 아래서 살아 온 사람들의 보편적 심성이 나의 그림을 통해 공감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화가의 길 역시 “익숙한 풍경으로부터 새로운 길을 나아가려는 여행자의 모습이지 싶다. 느낌을 퍼 올려 과거와 현재를 화폭에 공존시키는 나는 그런 면에서 신유목민”이라 덧붙였다.

권동철 @hankooki.com

*작품 캡션

-‘봉천 가는 길’(The Propping up the Sky), 각각 57×41㎝ 석회에 천연석채, 토분, 2017. (왼쪽부터) 무악재-여수|무악재-남해|무악재-홍천|홍제-개미마을

-‘봉천 가는 길-매봉’, 116.7×91㎝, 석회에 천연석채, 토분, 2017.

-화가 이종민



권동철 미술전문기자 dckewon5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