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Untitled), 212×730×40㎝ 나무(Wood), 2018
조각가 정현-2018금호미술관기획초대전, 조각·설치·드로잉 30여점, 5월22일까지

“철학적 사상은 말하자면 사변(思辨)의 음악인 것이다. 철학적 사상에는 마치 기능적인 것에 대한 사유와 현실적인 것을 만나게 하는 전환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사유의 실현에 있어서 존재를 경험하게 하는 사유의 경험이다.”<이성과 실존, K·야스퍼스 지음, 황문수 옮김, 서문당 刊>

육중한 지붕을 떠받친 서원(書院) 대들보로 추측되는 길이7m 폭50㎝의 용트림하는 듯 한 소나무다. 그 자체로 자태는 당당하다. 지난해 봄, 작가가 경남함양 어느 목재소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손톱만큼 보였던 옅은 옥빛에 강렬하게 끌렸던 나무다. ‘배움의 심벌로 회자되는 먹물’을 찢어진 침목(枕木)에 입혀 수련의 공간이었을 이 대들보에 얹어 놓았다. “어렵게 끌어내보니 단청(丹靑)이었다. 순간 아! 이거다 싶었다. 50년 단청전문가가 최소 300년은 된 나무로 서원기둥이 아니었을까 했다.”

이와 함께 대형드로잉 작품재료는 석탄찌꺼기 콜타르다. 물감에서 얻을 수 없는 깊이와 두께감(感)을 포착해 나무들의 뻗쳐 올라가는 힘을 표현했다. “유학 후 귀국하여 한국의 미의식에 천착했다. 아기가 태어나 모유수유를 통해 성장하듯 본원적 혼(魂)을 만나고 싶었다. 그 시절 사찰 등지를 많이 다녔는데 조각가로서 대들보라는 커다란 덩어리에 대한 흠모가 싹텄다.”

(왼쪽)650×150㎝ 종이에 콜타르 (오른쪽)종이에 콜타르 오일 바, 2017
성찰의 시간으로 인도

작가는 기차 레일 아래 혹독한 무게라는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침목, 한옥을 허물면서 나온 부러지거나 찢어진 나무들을 재료로 운용한다. 직립의 무게를 견뎌냈던 ‘대들보’작품 역시 이제 광활한 대지의 품처럼 수평으로 자리하며 수직으로 뻗쳐 오르는 침목의 열망을 감싸 안아 보듬는다. 마치 선대(先代)가 후대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미래의 버팀목이 되듯 대들보는 색 바랜 단청과 동행한다.

이렇듯 서원의 시대정신과 한국근대사를 관통해 온 철길의 침목을 심상에 투영해 볼 때 강인하고 부드러우면서 꺾이지 않는 올곧음으로 오늘까지 면면이 이어져오는 한국인의 정신사적 역사성과 조우하게 된다.

특히 경기도 고양시 덕은동에 위치했던 작가의 작업실과 이웃의 한옥들이 개발로 철거되면서 100년은 족히 넘었을 나무들의 시련 흔적이 드러낸 자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예민한 결을 작품화하여 함께 보여주고 있다. 나무들은 먹이 입혀지면서 새로운 형상의 생명을 부여 받는데 둥그런 성(城)을 쌓듯 지성의 힘처럼 뭔가 새로움을 구축하는 모습의 작품으로 선보이기도 한다.

“침목이나 철거한 나무들의 삐죽하고 뾰족하게 치고 올라가는 것에 강인한 의지가 함축되어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완전한 자유 그 해방에너지가 선사하는 초월적 생명력은 관람자를 성정 깊은 성찰의 시간으로 인도한다.

정현(鄭鉉)작가
한편 정현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및 동 미술대학원, 프랑스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1985~1991년)를 졸업했다. 현재 홍익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번 ‘정현(Chung Hyun)-2018금호미술관 기획초대전’은 조각ㆍ설치ㆍ드로잉 등 총30여점을 지하1~지상3층 전관에 걸쳐 4월 10일 오픈해 5월 22일까지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서 인터뷰 한 작가에게 조각가의 길에 대한 소회를 물어 보았다. “예술가는 무던히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 나의 재료들도 모두 그런 과정을 겪은 것들이다. 작품의 힘 있고 숭고해 보이는 침목처럼 고난을 견뎌내면 결국엔 반드시 좋은 에너지를 드러내 보인다.”

권동철 @hankooki.com



권동철 미술전문기자 dckewon5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