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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종의 어원(語源) 이야기] ‘설’의 어원과 역사

고어 ‘:설다(生)’에서 명사 ‘처음 → 그해의 맨 처음(正初)’을 뜻하는 ‘:설’ 비롯
  • 우리말에 남아 있는 은력(殷曆)의 자취, '섣달'. '설의 달: 설ㅅ달→섯달→섣달'의 변화과정을 거친 '섣달'은 음력12월임.은력에선 음력 1월이 아닌 음력 12월을 정월로 삼았음.
음력 1월 1일 설은 민족 大이동으로 大결집을 이루는 우리나라의 가장 큰 전통 명절이다. 온 나라에 노래와 춤이 울려 퍼지고 성묘객들의 발걸음과 설렘 가득한 어린이들의 재잘대는 소리들로 큰 기쁨과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설 풍경은 그 자체로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크나큰 축복이다. 주간한국 2015년 설날 합본호(제2565호)에서 기히 언급한 것처럼 ‘설’은 단순한 명절 명칭을 넘어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깃든 매우 소중한 역사어이다. 우리는 설의 날을 ‘설날’이라고 부른다. 1481년 간행 ‘두시언해(杜詩諺解)’ 권20에서도 똑같이 ‘설날’이라 했다. 다만, ‘~의’를 뜻하는 사이시옷을 중간에 넣어 ‘설ㅅ날’이라 적시했다.

이처럼 설의 날이 설날이듯, 설의 달은 당연히 ‘설달’이다. 두시언해에서 사이시옷(ㅅ)을 집어넣어 ‘설날’을 ‘설ㅅ날’이라 한 것과 똑같이, ‘설달’은 ‘설ㅅ달’이 된다. 그런데 ‘설ㅅ달’의 발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밟다’를 발음할 때 ‘ㄹ’을 탈락시키고 ‘밥따’로 소리하듯, ‘설ㅅ달’ 또한 ‘ㄹ’을 탈락시키고 ‘섯딸’이라 발음할 수 있다.

오늘의 한글맞춤법과 달리 속칭 ‘아래아(o)’를 썼고 소리 나는 대로 표기했던 옛날에는 두시언해, 구급방언해(1466), 구급간이방(1489), 역어유해(1690) 등에서처럼 ‘설ㅅ달’을 ‘섯ㄷoㄹ(→섯달)’로 기재했다.

그러다가 받침 ㅅ은 ㄷ과 같은 발음이어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에선 ‘섯달’을 ‘섣ㄷoㄹ’로 기록했다. 그 후 일제 치하 때 둥근 하늘을 상형한 우리말 1번 모음인 ‘하늘아(o)’자가 삭제된 이래 지금은 ‘섣달’이란 표기로 굳어졌다. <사진>의 표준국어대사전 ‘섣달’ 항목에선 그 변천과정을 간략히 정리해놓았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의 설명에 매우 이상한 점이 있다. 설의 달인 ‘섣달’은 설(음력 1월 1일)이 들어있는 달이기 때문에 음력 1월이어야 사리에 맞다. 하지만 사전에서는 ‘설의 달’을 뜻하는 ‘섣달’을 음력 1월이 아닌 ‘음력 12월’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현실 상황과 맞지 않는 모순적 대목이라 혼동이 온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의 그러한 정의는 오기(誤記)가 아니며 조상들의 옛 기록에서 근거한 것이다. 섣달은 ‘납월(臘月)’이라고도 하는데, <사진>의 두시언해 권10, 45장 앞면에서도 분명히 음력 12월 납월을 ‘섯달’이라 기록하였다. ㅅㅓㄽ달이 음력 1월이 아니라 12월이라는 이러한 기록들은 우리에게 음력 1월의 구정(舊正) 이전에 음력 12월을 정월로 삼았던 우리 민족만의 구구정(舊舊正), 곧 본정(本正)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옛적, 음력 12월을 정월로 정한 나라는 갑골문의 왕국으로 유명한 은나라였다. ‘춘추(春秋)’ 은공 원년의 조항에 대한 공영달의 주석, “夏以建寅之月(하이건인지월), 殷以建丑之月(은이건축지월), 周以建子之月爲正(주이건자지월위정)”에서처럼, 하력에서는 인월=음력1월을, 은력에서는 축월=음력12월을, 주력에서는 자월=음력11월을 한 해 12개월의 첫 달인 정월로 내세웠다.

그런데 하은주 이후 특이하게도 부여에서 은력을 썼다.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魏書) 부여전(夫餘傳)에 따르면, 부여에선 은력 정월에 제천 행사를 지냈으며 이는 나라의 큰 모임으로 연일 먹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었으니 이름하여 “영고”라 하였다(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食歌舞, 名曰迎鼓). 후한서 동이열전에서는 위 삼국지의 기록 중 “以殷正月祭天”이 “以臘月祭天”으로 되어 있다. 은력에서 정월은 음력 12월(축월)이고, 음력 12월은 별칭으로 납월(臘月)이기 때문이다.

BC1018년 2월 22일 은나라가 주나라에 패망하자, 은의 태사이자 공자가 숭앙하여 마지않았던 현인 기자(箕子)는 “나는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5000여 명을 이끌고 조상들의 본거지로 돌아가 후조선(後朝鮮)을 건립한다(이와 관련 보다 자세한 사항은 2019년 1월 8일자 뉴시스 “기자가 동북으로 간 까닭은, 뿌리로의 복귀” 참고).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결심은 독립국 기자조선의 후예인 부여(BC194년 기자조선 멸망 후, BC 2세기에 부여 건국)에서도 이어지니, 천하가 주나라의 세상이 돼 모두 주력(周曆)을 쓰는데도 부여는 음력 12월을 정월로 삼는 은력 사용을 고수했다.

오늘날의 설 연휴에 부여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을 거행했음은 매우 놀랍고도 의미심장하다.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의 기록처럼 동양의 옛 법에서는 오직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후들은 경내 산천에만 제사할 수 있을 뿐 하늘에는 제사할 수 없었다. 그처럼 부여가 천자국을 표방하였으므로 광개토호태왕 비문에서 “옛적 시조 추모(주몽)왕은… 북부여에서 나왔으며 천제의 아들”이라고 당당히 선언한 것이다.

정리하면, 이처럼 은력을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사용했기 때문에, 한 무제의 태초력 공포 이후 그걸 좇아 정월을 변경, 음력 1월 1일을 새로운 설날로 지내왔음에도 여전히 후손들의 무의식 속에 남아 사전에서 ‘섣달’을 음력 12월이라 기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설’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필자는 주간한국 2015년 제2565호에서 음력 11월인 동짓달 다음의 음력 12월 섣달은 대한(大寒)달인 점에 착안, ‘寒(찰 한)’자와 유관한 ‘瑟(쓸쓸할/차가울 슬)’자를 어원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확실한 문헌 증거가 필요하다.

조선 시대의 문헌들에서 ‘설’은 왼쪽에 점을 둘 찍는 상성(上聲)이었다. 그리고 “나이 몇 살”할 때의 ‘살’의 고어 ‘:설’도 상성이었으며, ‘덜 익다’를 뜻하는 ‘:설다’의 ‘설’도 상성이었다. ‘덜 익다’는 ‘미숙(未熟)하다’이고 ‘낯설다’는 유의어이니 ‘설’이 들어간 이들 단어들은 모두 어원상 동계어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공통 의미가 ‘처음, 시작’이라는 점이다. ‘설’은 한 해의 시작일이다. 또 설날에 나이 한 살을 더 먹으니, 나이를 세는 단위인 ‘살(←설)’은 인신된 의미이고, ‘낯설다’는 처음 보는 얼굴이라 익숙지 않다는 말이다. 유의어 ‘어설프다’는 ‘초짜’라서 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툴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처음(初)’을 뜻하는 ‘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기본어형이 ‘:설다’임이 증명되는 ‘역어유해’ 하편 44의 용례 ‘선 것(生的)’에 그 확실한 단서가 포착된다. 바로 ‘生(설 생)’자이다. ‘生(생)’은 새싹이 땅위로 생겨나는 모습을 본뜬 글자로 그 본의는 ‘생겨나다(生出, 發生)’이며 나아가 ‘날 것, 익히지 아니하다’ 등을 뜻한다. ‘생겨나다’의 유의어는 ‘기원(起源)하다’로 ‘사물이 처음으로 생기다’를 뜻하니, 고어 ‘:설다(生)’에서 역으로 명사 ‘처음 → 그해의 맨 처음(正初)’을 뜻하는 ‘:설’이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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