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문신 송창명의 백반증


미국 톱모델에서 보는 백반증(白斑症, Vitiligo).

근래 미국 최정상 모델이 자기 얼굴과 몸에 나타난 백반증을 숨기기보다는 자기표현의 일환으로 당당하게 드러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백반증은 피부가 하얗게 변하는 현상이므로 원래 피부색이 하얀 서구 사람보다는 상대적으로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주변 피부색과의 대비(contrast) 때문에 더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 피부과학을 전공한 필자가 조선 시대 초상화에서 바로 그 색소성 피부병인 ‘백반증’을 발견하곤 놀랐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아울러 그즈음 인사동 고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명인초상대관(韓國明人肖像大觀)》(이강칠 편, 탐구당, 1975)을 품에 안고 무척이나 행복해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희귀본인 조선 시대 초상화의 대표적 도감(圖鑑)을 만났으니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필자는 국내 미술사학계의 큰 어른인 이강칠(李康七, 1926~2007) 선생으로부터 전화까지 받아 벅찬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선생께서는 1980년대에 필자가 <월간 미술세계>에 기고한, 조선 초상화에 나타난 다양한 피부 병변에 대한 글을 읽고 반가웠다는 말씀과 함께 조선 초상화가 왜 자랑스러운지를 자상히 일러주셨다.

조선 시대 문신 송창명(宋昌明, 1689~1769)의 초상화
도감을 살펴보던 필자는 영조 때 문신 송창명(宋昌明, 1689~1769)의 초상화를 보곤 처음엔 관리를 소홀히 해서 파손된 것으로 생각했다. 초상화 안면의 하얀 부분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퇴·변색(退變色)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확대경으로 자세히 관찰하니 정상 피부와 흰색 부위 사이에 군데군데 검은 경계선이 보였다. 순간 필자는 ‘백반증’일 거라는 확신을 갖고 더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백반증 피부 병변이 활성화하면 정상 피부보다 검게 되었다가 이내 하얗게 변한다. 임상적으로는 ‘경계과색소침윤(境界過色素浸潤, Marginal hyperpigmentation)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런 현상을 송창명의 초상화에서 본 것이다. 임상의로서 어려운 진단을 찾아낸 희열 같은 게 느껴졌다. 필자가 이런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이강칠 선생으로부터 조선 왕실의 기록물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688년 숙종(肅宗) 14년 기록에 초상화와 관련해 “한 가닥의 털(毛), 한 올의 머리카락(一髮)이라도 달리 그리면 안 된다는” 지침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송창명 선비의 초상화에는 또 다른 큰 미술사적 의미가 있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경계과색소침윤’을 근거로 1982년, 18세기 중엽 조선 시대 초상화에서 ‘의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EBM, Evidence Based Medicine)’ 백반증 피부병을 확인했다는 논문 <역사적 초상화에 나타난 백반증>을 저명한 국제 학술지에 기고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학술지 편집위원회는 어떠한 반대 의견 없이 필자가 제출한 논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사실을 통보해왔다. 우리 조선 시대 초상화가 국제 학술지에 의해 당당히 평가받는 뜻깊은 순간이었다. 이는 조선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병변을 임상적으로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국제적으로 인증받은 것으로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초상화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쾌거였다. 이와 더불어 1985년 영국에서 출간한 전문 단행본(Monograph) 《백반증(Vitiligo)》(Blackwell Science Ltd, 2000)은 필자의 논문을 다시 인용하였다. 송창명의 초상화가 세계 의학사에서 ‘백반증’으로는 가장 오래된 ‘시각적 기록물’이라 하겠다. 우리 조선 시대 초상화가 자랑스러운 이유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