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라이프

절망을 지탱하는 기억의 형상

동판화가 박선랑… ‘Don‘t Forget’ 초대전, 6월 1~14일, 갤러리 피랑
  • Don‘t Forget, 65.5×83㎝, etching, 2019
“나는 마음이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기 위하여 ‘관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내가 무엇인가를 의욕하거나 두려워할 때 동시에 나는 의욕하거나 두려워한다는 점을 의식한다. 그래서 나는 의지작용과 공포를 관념에 포함시킨다.”<데카르트의 철학, 안소니 케니 지음, 김성호 옮김, 서광사 刊>

적막만이 흐르는 어느 외진 공간처럼 느껴진다. 방(房), 도시의 어느 빌딩 후미진, 구겨진 자아의 페이지를 푹 숙인 채 들여다보고 있는, 정지된 듯한 모습이다. 검은 몸통과 손발의 극명한 대비 외에는 불모지처럼 풀 한 포기조차 아무것도 없다. 주름이나 근육들을 강하게 처리함으로써 뼈마디가 드러나는 초라함만으로도 진한 아픔이 전율처럼 밀려드는데…. 신체의 일부분을 생략, 상징, 과장, 패러디 등의 형식을 통하여 동판화로 표현한 손과 발이 강조된 크게 그려진 그림이다. 그래서 관람객은 손과 발에 이끌리듯 볼 수밖에 없다.

원형을 이탈한 휘어진 뼈마디, 고르지 못한 발톱의 상흔이 고스란히 가슴팍에 꽂히는 그 순간이 온다면, 바로 작가가 열어놓은 숨의 공간에 들어선 셈이다. 이를테면 부조리에 휘둘려 찢겨진 순진한 가슴의 파편들이 밤하늘에 흩어지던 허공 그 비애감에 젖었던 청춘의 눈물이 투영되는 그러한 여지의, 임팩트인 것이다.

“표정을 보고 의향을 읽는데 익숙하다지만 나는 이 깡마르다 못해 스산한 손발로도 함축의미를 전달하는데 부족함 없는 방법론을 지향한다. 거기엔 ‘나를 바라보라고, 날 쳐다봐 달라고’하는, 어떻게 보면 절실한 인간내면의 모습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식과 남편 또 벗들에게 ‘나를 잊지 말아주세요!’라는 심경으로 작업했다.”

어둠이 어둠을 누르면
  • 화가 박선랑.
박선랑 작가는 경북 영주 출신으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석사 졸업했다. 2000년 인사갤러리 첫 개인전부터 ‘인간’주제의 블랙시리즈 동판화 작업을 발표하였다. 이후 ‘갤러리 상’에서 2m에 달하는 대형판화 10여점을 선보여 일약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자그마한 여자가 강한 노동력을 요구하는 동판화를 그렇게 크게 다작(多作)한 것은 드문 사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충무아트센터, 유나이티드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이번 열세 번째 초대전은 경기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갤러리 피랑’에서 6월 1일부터 14일까지 보름간 열린다.

한편 근작엔 약간의 컬러를 가미하지만 오늘까지 일관되게 블랙을 작품세계의 중심색채로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그에게 수묵화처럼 검은색으로만 작업하는 고집이 궁금했다. “모든 색을 섞으면 검게 된다. 블랙은 울림이 가장 큰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작품메시지와 잘 어울린다고 간주되는데 내용도 단순하고 응축되지만 무엇보다 내 느낌을 깊게 표현해주기 때문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와 함께 ‘판화가의 길’에 대한 소회를 청했다. “제일 슬펐던 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힘만 들고 돈 안 되는, 시커멓게 어두운 작업만 하느냐?’라는 말을 들을 때였다. 그러나 나는 어둠이 어둠을 눌러서 밝아지는 것이라 믿는 사람이다. 동판을 찍을 땐 무거워서 힘들어 하지만 몰입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아니라 되레 정신이 맑아진다. 그래서일까. 나는 작품과는 또 다르게 일상을 굉장히 명랑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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