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이 사라진 정치, 양극화에 시달리는 경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이해충돌 속에서 우리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부모의 경험이 더이상 자식의 지혜가 되지 못하는 시대의 불행은 우리 모두의 안타까움이다. <주간한국>은 따듯한 감성의 기족 이야기를 애정 어린 필체로 풀어놓으면서 온가족이 다시 한번 가족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최민호 작가의 글을 격주로 소개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들과 호흡하고 있는 필자의 작품들을 ‘미노스의 감동단편 다이제스트’로 재각색한 주옥 같은 글들을 통해 우리 삶의 영원한 디딤돌인 가족사랑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 왕국에는 왕국을 지키는 두 보물이 있었다. 보물 하나는 높은 종루 위에 매달려 있는 종이고, 또 다른 보물은 높은 성곽 위에 놓여진 북이었다.

종루에는 큰 종과 그 주위에 작은 종들이 매달려 있어, 종들이 어울려 ‘땡그랑 땡그랑’ 울릴 때면, 아름다운 종소리가 왕국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종소리가 울리면 왕국의 백성들은 하루 일을 마치고, 경건하게 기도를 하거나 신의 축복을 감사하는 예배를 드렸다. 종은 왕국의 평화를 지켜주는 수호자였다.

왕국의 성곽에는 큰 북과 작은 북들이 놓여 있었다. 북들은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둥둥둥둥’ 울려 적의 침입을 알려주었고, 백성들은 성 위로 올라가 침범하는 적과 용감하게 싸웠다.

큰 북과 작은 북이 번갈아가며 울리면 용사들은 사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북은 왕국의 안전을 지켜주는 파수꾼이었다. 종루의 종과 성곽의 북은 동시에 울리는 법이 없었다.

전쟁과 평화는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종소리가 울릴 때는 북이 잠자코 있었고, 북소리가 울릴 때면 종이 조용히 있었다. 서로의 소리가 보다 잘 들릴 수 있도록 배려하였던 것이다.

종소리와 북소리는 어느 때 누가 울릴 때인지를 알아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다. 사람들은 종소리를 들을 때는 마음이 경건해졌고, 북소리를 들을 때는 팔과 다리에 힘이 났다.

왕국의 백성들은 풍요롭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성실하게 일하고, 서로에게 감사하며 살고 있었다. 왕국은 나날이 발전했다.

왕국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이웃 왕국은 그렇지 않았다.

왕은 고집과 욕심이 강했고 신하들은 서로 충신이라 아부했다. 좋은 것이 있으면 왕과 신하가 먼저 차지하여 백성들은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하기만 했다.

백성들은 견디다 못해 기회만 있으면 이웃왕국으로 도망쳐 나갔다. 백성들이 이웃왕국으로 도망치는 것을 본 왕은 매우 못마땅하였다.

하루는 신하들을 불러 말하였다. “왜 백성들이 이웃 왕국으로 도망쳐 가는가? 이웃왕국에 무엇이 있는가? 백성들이 이웃왕국으로 도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는 분부를 내렸다.

그러나 아무리 일을 해도 왕과 신하들이 좋은 것을 다 차지하는 나라를 좋아할 백성은 없었다. 백성들은 계속 도망쳤다.

이때 말 잘하고, 재주가 뛰어난 신하가 왕에게 말하였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백성을 못 도망가게 할 것이 아니라, 이웃 왕국을 쳐들어가서 빼앗으면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웃 왕국에 북소리가 있으니 어떻게 우리가 쳐들어가 이길 수 있단 말이냐?”하고 왕이 물었다.

재주 좋은 신하는 귓속말로, “저들에게 북과 종이 있다지만 지금 이웃 왕국의 왕은 매우 어리석다 하옵니다. 저에게 말 잘하는 사람 4명만 골라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저 왕국을 쳐서 이길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왕은 신하의 말을 믿고 말 잘 하는 사람 4명을 뽑아 신하에게 주었다. 머리 좋은 신하는 그들에게 각각 비밀스런 지령을 주고 훈련을 시켰다.말 잘하는 사람 4명은 몰래 이웃 왕국에 숨어 들어갔다.

한 명은 백성으로 위장하여 마을로 들어갔다. 한 명은 종치는 법을 배워 종루에 숨어 들어갔다.

한 명은 북치는 법을 배워 성곽에 숨어 들어갔다. 한 명은 신하로 위장하고 왕이 사는 왕궁에 숨어 들어갔다.

네 명의 말 잘하는 적국의 사람들은 각각 숨어 들어간 곳에서 열심히 말을 만들어 퍼뜨렸다.

평화가 오랫동안 지속되자, 왕국에서는 매일 저녁 종소리가 ‘땡그랑 땡그랑’ 울리며 사람들을 종루로 부르거나 기도의 시간으로 인도하였지만 성곽의 북은 울리는 법이 없었다.

종이 울릴 때마다 사람들은 종소리에 감사하며 종루의 종을 칭찬했다.

반면에 북소리는 울리지 않으니, 성곽위의 북을 찾아가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북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마치 북이 없는 것 같았다. 북으로 위장한 말 잘하는 사람이 작은 북들에게 매일 같이 속삭였다. 어느 날 작은 북 하나가 큰 북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대장님. 우리가 너무 무시당하는 거 아닙니까? 종은 저렇게 매일 울려 사람에게 감사를 받는데 우리는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으니 우리들이 얼마나 수고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알기나 하겠습니까?”

큰 북이 말했다. “잠자코 있게나. 앞을 똑바로 보고$ 언젠가 우리를 알아줄 때가 있을 거야. 우리는 오직 앞만 보고 적이 쳐들어오는지만 보고 있으면 돼. 그런 것 신경쓰지 말게”하고 나무랐다.

작은 북은 큰 북의 말에 잠자코 있었지만 내심 못마땅하였다. 작은 북은 다른 북들에게 작은 소리로 불만을 말했다. 작은 북들은 처음에는 큰 북의 말을 들었지만, 매일 불만을 이야기하는 작은 북의 말에 슬그머니 공감하기 시작했다. 적군의 말에 속기 시작한 것이었다. 세월은 여전히 평화롭게 흘러갔다.

매일 종소리를 울리는 종은, 평화가 길어질수록 종루를 찾는 사람들이 어느 때부터인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성들 사이에 매일 종루를 찾아갈 것이 아니고 필요할 때 찾아가면 될 것 아니냐는 말이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에게 감사를 드릴 일이 뭐가 있느냐는 말도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우리가 일하였지 종이 무슨 일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백성들도 적국의 말 잘하는 사람의 말에 속고 있는 것이었다.

예전처럼 경건히 기도를 드리거나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하루는 작은 종이 큰 종에게 말했다. “사부님. 우리가 이렇게 매일 헌신하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요? 평화가 기도와 감사 덕분인 줄 모르고, 그저 저절로 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이렇게 종루를 찾는 사람들이 줄다 보면 나중에는 우리를 찾는 사람이 영영 끊어지지 않을까요?” 큰 종이 말했다.

“그런 생각 말고… 은은히 종소리를 울리게. 변함없이 종소리를 울려 신께 축복을 구하고 사람들을 겸허하게 하게. 깨닫는 사람들은 깨닫기 마련이네”라고 타일렀다.

작은 종은 내심 불만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종들에게 작은 소리로 불평을 말하고 다녔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갔다.

왕국의 똑똑하고 말 잘하는 홍보대신이 하루는 왕을 찾아왔다.

“왕이시여. 요즘 백성들 사이에 이런 말이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종루의 종들은 매일매일 종소리를 울리는데 평화로운 이 시절에 매일 울리는 종소리가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이틀에 한 번으로 줄이면 백성들이 더 평온하게 더 열심히 자기생활을 할 수 있겠다고 합니다. 왕께서 살펴주십시오.”

홍보대신은 언제부터인지 말 잘하는 적군의 친구가 되어 있었다. 어리석은 왕은 귀가 솔깃했다. 왕도 매일 기도를 하는 것이 싫증나고 있던 참이었다. 왕은 큰 종을 불러 말하였다.

“종소리를 이틀에 한번으로 줄이고, 소리도 크기를 반으로 줄였으면 좋겠소.”

왕의 말을 들은 큰 종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이 나라의 평화는 하늘의 은총 없이는 지켜질 수가 없습니다. 겸허하게 신의 축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매일매일 울려야 합니다.”

난감해진 왕이 홍보대신에게 의견을 구했다. 홍보대신은 여론을 내세워 왕에게 말했다. “왕이시여, 그것은 종들의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종소리를 줄이면 영향력이 줄고 찾아오는 백성들이 줄어들까봐 그러는 것입니다. 저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여론이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왕은 홍보대신의 말이 옳다고 믿었다. 종소리는 반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왕국의 백성들은 조용히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왕과 홍보대신을 칭송하였다.

어느 날 홍보대신이 왕을 찾아와 조용히 말했다. “사람들의 여론이 북이 아무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북도 가끔 둥둥 울려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왕은 홍보대신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려 큰 북을 불러 말했다. “가끔 북소리를 울려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었으면 좋겠소. 그래야 백성들이 정신 차리고 나라를 지킬 것 아니요?”

왕의 말을 듣자 큰 북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북은 전쟁이 나지 않으면 절대로 울려서는 안 됩니다. 북이 자주 울리면 백성들의 경계심이 무뎌질 것입니다. 그럴 때가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아니 됩니다.”

큰 북의 말에 곤란해진 왕은 다시 홍보대신에게 물었다. “왕이시여. 저 북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저들은 일하는 게 싫어서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저들은 놀고먹고 있습니다. 여론이 그렇습니다.”

우매한 왕은 홍보대신의 말을 듣고 가끔 북소리를 울리라고 명령했다.

성안에 북소리가 둥둥 울렸다. 사람들은 전쟁이 난 줄 알고 깜짝 놀라 성곽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연습으로 울린 것이라 했다.

북이 울리던 날, 종은 종소리를 멈추어야 했다. 북과 종이 동시에 울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또 북소리가 둥둥 울렸다. 작은 북이 신이 난 듯 큰 북에게 말하였다. “북소리가 나니까 사람들이 우리에게 몰려오네요. 우리가 이제 중요한 줄 아는 모양이지요. 북소리를 더 크게 자주 울릴까요?” 이 말을 듣고 큰 북이 말했다.

“그런 못된 말을… 북소리가 자주 나서는 안 되고 종소리가 멈추어서도 안되는 법인데$우리는 가만히 있고 종소리가 더 크게 울려야 하는 것인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어느 날 작은 종이 큰 종에게 말했다. “북소리가 나도 진짜 전쟁이 아니니까 종소리를 멈추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멈추고 있으니, 사람들이 감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큰 종이 말했다. “무슨 말을… 종과 북이 동시에 울리면 큰 일 나요. 북소리를 내지 말아야 종소리를 낼 수 있는데…”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어느 날은 종소리도 북소리도 못 듣는 날이 생기게 되었다. 서로 소통이 안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은 아침에는 북소리를, 저녁에는 종소리를 듣는 일이 생겼다. 사람들은 아침에는 성곽으로, 저녁에는 종루로 달려갔다. 어느 날은 같은 시간에 종소리와 북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이런 일이 생기자, 종들은 북들에게, 북들은 종들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차츰차츰 감정이 상하게 되었다.

그런 나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큰 북이 둥둥둥둥 크게 울렸다. 이웃나라 적이 진짜로 침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큰 종은 땡땡땡땡 더 크게 울렸다. 북소리에 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큰 북은 더욱 크게 둥둥둥둥, 큰 종은 더 크게 땡그랑땡그랑 소리가 커졌다. 백성들은 뿔뿔이 이리저리 달려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적들이 성안으로 쳐들어 왔다. 가장 먼저 북을 찢어 버렸다. 그 다음 종루에 올라 종을 깨뜨려 버렸다.

어리석은 왕은 우왕좌왕하다 홍보대신을 불렀지만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백성이 죽고, 왕국은 불타고 말았다. 어리석은 왕을 원망해도 소용은 없었다. 왕도 팔다리를 찢겨 죽었기 때문이다.

왕국에서는 종소리도 북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 미노스 최민호 작가 프로필

본명은 최민호, 대전 출신으로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공직에 입문했다. 충청남도 행정부지사, 행정자치부 인사실장에 이어 소청심사위원장,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하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석사, 일본 동경대학 법학석사, 단국대학 행정학 박사를 취득한뒤 미국 조지타운 대학에서 객원연구원을 역임했다. 공직퇴임후 미노스라는 필명으로 작가로 변신해 단편집 “어른이 되었어도 너는 내딸이니까”를 출간해 호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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