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이 사라진 정치, 양극화에 시달리는 경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이해충돌 속에서 우리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부모의 경험이 더이상 자식의 지혜가 되지 못하는 시대의 불행은 우리 모두의 안타까움이다. <주간한국>은 따듯한 감성의 기족 이야기를 애정 어린 필체로 풀어놓으면서 온가족이 다시 한번 가족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최민호 작가의 글을 격주로 소개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들과 호흡하고 있는 필자의 작품들을 ‘미노스의 감동단편 다이제스트’로 재각색한 주옥 같은 글들을 통해 우리 삶의 영원한 디딤돌인 가족사랑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옛날 어느 마을에 장이 섰다. 많은 사람들이 장보러 장터에 왔다. 엿 만들어 파는 사람, 병아리 파는 사람, 고추와 마늘을 파는 사람, 국밥 파는 사람. 장날에는 온갖 사람이 물건을 팔고 사느라 소란했다. 버젓이 큰 가게를 열고 물건을 파는 사람도 있었고, 작은 좌판 위에 보잘 것 없는 물건을 놓고 지나가는 장꾼들에게 사달라고 손짓하는 가난한 사람도 있었다.각설이 타령을 하면서 요란하게 약을 파는 사람, 줄타기와 접시돌리기, 마술을 보이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도 있었다. 장날에는 우스꽝스런 사람, 못 보던 물건들이 사방팔방에서 나와, 구경하는 구경꾼과 장꾼들로 북적대곤 했다.

행색이 초라한 나그네 한 사람이 등에 봇짐을 지고 장터에 나타났다. 그는 장터 이곳저곳을 유심히 바라보며 유유히 장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의 눈에 어린 아기를 업고 작은 좌판위에 바느질한 버선을 파는 한 젊은 엄마가 눈에 띄었다. 어린 아기는 엄마 등에서 앙앙 울고 있었다. 나그네가 아기 엄마에게 다가갔다.

“왜 아이가 그렇게 울고 있소? 젖이라도 물리구려.”젊은 엄마는 나그네를 쳐다보고는 눈물을 지었다.“젖이 나오질 않아요……. 버선이 많이 팔려야 할 텐데…….”엄마는 우는 아기를 달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버선을 사달라고 애걸했다. 엄마가 잘 먹지 못해 젖이 잘 안 나오는 것이었다. 버선을 팔아야 아기에게도 먹을 것을 사줄 수 있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젊은 엄마를 보면서 봇짐을 내렸다. 봇짐 속에서 그림붓과 물감과 종이를 꺼냈다. 나그네는 받침대를 세우고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잘 차려진 밥상이었다.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밥 한 그릇이 그림에 그려졌다. 고기도 듬뿍 들어 있었다. 나그네가 그림 그리기를 마치자 아기 엄마에게 말했다. “드시오. 따뜻할 때…….” 그러면서 그림 속에 손을 넣어 국밥을 꺼내는 것이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엄마에게 나그네는 국밥을 건네면서 어서 드시라고 했다.그림 속의 국밥이 진짜 국밥이 된 것이었다. 엄마는 놀라면서 허겁지겁 국밥을 먹었다. 아기에게도 따뜻한 국물을 먹이자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맛있게 먹었다.

나그네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그네는 다시 종이 위에 쌀 한가마를 그렸다. 그리고는, “가지고 가시오.”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고개를 수없이 숙여 나그네에게 절을 하였다. 지나가는 장터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나그네를 바라보았다. 나그네는 말없이 봇짐을 싸서 걸음을 옮겼다.

장 저쪽에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서 기다리고 있는 곳이 있었다. 대장간이었다. 대장간에는 대장장이들이 열심히 낫과 호미를 불에 달구어 만들고 있었지만, 사려는 사람들이 많아 제때 팔지를 못하고 땀만 비 오듯 뻘뻘 흘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줄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농기구가 없으면 농사짓기가 어려워 오늘 같은 장날에 장만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날은 저물어가고 호미와 낫이 만들어지는 것은 더디기만 했다.

이 모습을 보던 나그네가 대장간 옆에 봇짐을 풀었다. 그리고 종이 위에 낫과 호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종이 위에 그려진 낫과 호미를 꺼내 대장장이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놀라는 것은 대장장이나 구경꾼이나 말할 것도 없었다. 나그네는 빠른 솜씨로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의 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그네 덕분에 다들 연장을 살 수 있었다. 대장장이와 농사꾼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그네를 쳐다보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나그네는, “연장이 없으면 농사를 어떻게 짓겠소. 어서 부지런히 일하시오.”하였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 둘 나그네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그네는 그 중 아까부터 눈을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찾는 사람을 보았다. “무엇을 그리 찾으시오?” “글쎄, 오늘은 홍시장수가 안 나왔는지. 통 보이지를 않는구려…….” “홍시 장수는 왜 찾소?” “늙으신 어머니가 이가 빠져서 홍시를 드려야 잘 잡수시는데 아무리 찾아도 이놈의 홍시장수가 오늘은 안 나왔나 보오……. 허어 참” 하면서 난감하고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그 표정을 보자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다시 봇짐에서 그림 도구를 꺼냈다. 나그네는 종이 위에 작은 감나무를 한 그루 그렸다.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림을 바라보았다. 나그네가 붓을 놓자 그림 속의 작은 감나무가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잎이 무성해지면서 감나무는 종이 밖으로 가지를 뻗었다. 감나무의 키가 한 길이나 높아졌다. 그러자 가지에서 감이 열리기 시작했다. 점점 커지면서 익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무르익어 먹음직스런 붉은 홍시가 달리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홍시를 여러 개 따서 노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 주었다.“가져가시오. 늙으신 어머니에게 효도하시는 모습이 참 좋소이다.” 그러면서 놀란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이곳에 노모를 모시고 있는 분들은 다 가져가시오.” 사람들이 너도나도 손을 내밀어 홍시를 가져갔다. 홍시를 손에 넣은 사람들은 늙으신 부모에게 드릴 생각에 싱글벙글 웃음이 가득했다.

나그네 뒤를 사람들이 줄줄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그네는 사람들과 함께 장터를 돌아 다녔다. 커다란 떡집 앞에 왔다. 가게 옆에 한 아이가 땅에 어지럽게 떨어진 떡을 주우며 울고 있었다. 떡집 주인은 아이에게 눈을 부라리며, “다른데서 장사하란 말이야. 왜 남의 떡집 앞에서 장사를 한다고 방해야, 방해가.”하면서 다시 한 대 때릴 듯이 아이에게 덤볐습니다. 아이는 손으로 매를 막으며,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이는 울면서 흙 묻은 떡을 주섬주섬 주웠다. 떡은 이미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나그네는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아이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고 나서 나그네는 붓과 종이를 꺼냈다.이번에는 떡 가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진열대에 먹음직스런 떡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떡가게 그림이 그려졌다. 나그네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이 그림 속의 떡을 보시오. 얼마나 먹음직스럽소. 다 하나씩 가져가 드시오.”사람들이 달려들어 떡을 손에 들었다. 매 맞고 울던 아이에게는 듬뿍 꺼내 한 아름 안겨주었다. 아이는 울던 손으로 떡을 받고는 얼굴을 활짝 펴며 기뻐하였다. 이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떡가게 주인도 슬쩍 손을 내밀어 떡을 하나 받았다. 순식간에 그림속의 떡이 다 없어졌다.

사람들이 떡을 다 가져가자 나그네는 종이와 붓을 챙기고, 울던 아이의 손을 잡고 장터를 떠났다.떡가게 주인은 눈앞에서 벌어진 이 신기한 일에 넋이 빠졌다. 손에 쥔 떡을 보니 자신이 만든 떡같이 먹음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개 더 가질 걸…….’ 속으로 후회하면서 돌아서는 순간 주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게 진열대 위에 있던 떡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없어졌던 것이다.

나그네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장터를 걸어 나왔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당신은 누구시오? 가지 말고 더 그림을 그려주시오.”사람들은 나그네에게 애원하였다. 이때였다.

떡가게 주인이 몽둥이를 들고 나그네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었다. 옆에는 포도청의 포졸들도 오랏줄과 방망이를 들고 함께 뛰어오고 있었다. 떡 가게 주인은 나그네를 보자, “저기 있소. 저놈이 우리 가게 떡을 다 훔쳐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소. 어서 잡으시오.”하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떡 가게 주인과 포졸을 보자, “나는 도둑이 아니오. 나는 떡을 훔치지 않았소. 그림 속의 떡을 나누어주었을 뿐이오.” 하였다. 그러나 포졸들은 믿을 수 없다며 떡 가게 주인의 말만 듣고 나그네를 포박하려 했다.

나그네는 봇짐 속의 종이를 다시 꺼냈다.“보시오. 내가 보여 드리리다.” 나그네는 포졸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리고 포졸이 들고 있는 방망이에 금을 그렸다. “당신들의 방망이를 보시오.” 포졸들이 방망이를 보자 방망이에 그림 속 같은 금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놀란 눈으로 나그네를 보았다. 다음에는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 포졸들의 갓끈을 붓으로 지웠다. 그러자 포졸들이 쓰고 있던 갓끈이 전부 끊어지는 것이었다. 포졸들이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좋소. 다음에는 당신들의 목에 금을 그리고 지워 보이겠소. 어떻소?” 포졸들은 놀라 모두 달아나고 말았다.

사람들이 다 같이 나그네에게 손뼉을 쳤다. 나그네는 사람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서로 도와 착하게 사시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이 열매 맺고, 욕심을 심으면 죄악의 열매를 따는 법이오. 욕심을 버리면 그림 속의 떡이 진짜 떡이 될 것이오.” 사람들이 놀라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오? 어디서 오셨소?” “나? 나는 그림의 떡 장수요. 안녕히 계시오. 언젠가 다시 오리다.” 이런 말을 하고 나그네는 종이 위에 근사한 대궐집을 그렸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종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땅에 엎드려 그림 속으로 사라진 나그네에게 절을 하였다. 모두들 나그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 미노스 프로필

본명은 최민호, 대전 출신으로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공직에 입문해 충청남도 행정부지사, 행정자치부 인사실장에 이어 소청심사위원장,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등 차관급 고위직을 세번이나 거쳤다.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하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석사, 일본 도쿄대학 법학석사, 단국대학교 행정학 박사를 취득한뒤 미국 조지타운 대학에서 객원연구원을 역임했다. 공직 퇴임 후 고려대·공주대 객원교수, 배재대 석좌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홍익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30여년의 공직생활 퇴임후 '어른이 되었어도 너는 내 딸이니까(새움출판사)'라는 단편소설과 동화가 있는 이야기책을 출간, 동화작가로 데뷔했다. 단순히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童話)'라는 장르를 뛰어넘어 남녀노소 모두를 아우르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화(動話)'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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