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생광 회고전, 5월 28일~10월 20일, 대구미술관

단군, 67×42.7㎝ ink&color on paper, 1970s

“역사를 떠난 민족이란 없다.전통을 떠난 민족은 없다. 민족예술에는 그 민족고유의 전통이 있다. 박생광, 1984년” <최병식 미술평론 中>

피리 부는 노인이라는 뜻의 ‘노적도(1985)’는 화백이 생애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다. 미완성으로 끝난 작품 속 노인은 박생광 자신이다. 대구미술관 김혜진 학예연구사는 “화백은 역사단절의 비애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의 민족과 정체성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한 것이다. ‘노적도’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전시되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림과 함께했다”라고 하였다. 화가 박생광(1904~1985)은 80년대 작업에 제작연도를 단기로 표기하기 시작한다. 이전 ‘내고(乃古)’로 쓰던 호를 순 한국식 ‘그대로’로 바꿔 사용할 만큼 한국의 민족성을 중시했는데 그 뿌리를 단군에서 찾았다. “내가 그린 명성황후는 역사의 기록이라기보다는 고발로 승화되어진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1984)”라고 한 그의 어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최병식(경희대 교수) 미술평론가는 “안중근과 윤봉길의 드로잉에서도 작품 초고를 보면, 아래 부분을 형장으로 하고 윗부분에 두 사람을 동시에 그려 넣으려는 구도설정에서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 의미가 아니라 보다 극적인 장면들의 직접대비를 통하여 항의와 고발의미를 표출하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파악했다.

노적도, 138×140㎝, 1985

새로운 한국화 확립

박생광 작가가 주목받기 시작한 때는 그의 나이 70대였다. 기존의 기법을 버리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고 구도자적 자세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만큼 화백의 역사화는 1984~85년 마지막 2년간이 절정기로 손꼽히고 있다. 최병식 미술평론가는 화백의 역사관을 교우영향에서도 보고 있다. “설창수(1912~1998)는 진주에서 개천예술제 제사장을 맡았으며, 소설가 이병주(1920~1992) 역시 박생광과 막역한 사이였다. 박생광은 시인 구상(1919~2004)과의 교분연결고리를 갖는다. 구상 역시 기독교적 존재관에 바탕을 두지만 한국의 건국신화와 선불교적 명상, 노장사상에도 심취하였다”라고 했다. 박생광 화백은 우리 민족의식을 심화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지만 안타깝게도 10점으로 계획되었던 역사화시리즈는 ‘명성황후(1984)’, ‘전봉준(1985)’, ‘역사의 줄기(1985)’ 3점에 그쳤고 85년 7월, 후두암 병세가 악화되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구열 미술평론가는 저서 ‘청여산고(靑餘散稿)①’에서 “거의 대작 내지 파격적 거작으로 연작된 그 말년의 연작은 모두 확연한 한국미의 주제로 추구되었다. 어떠한 전통적 형식이나 수법에서도 벗어난 자유로운 독자적 표현방법으로 창작되었다. 그것은 모든 역사적 한국미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적극적인 찬미였다. 그로써 박생광은 현대한국화로서 감동적 새 형태를 성립시킨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유홍준(명지대 석좌교수) 미술사가는 ‘박생광-전통채색화의 복권을 위하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리하여 다시 김원룡 선생의 말을 빌리면, 박생광은 새로운 한국화를 확립했다. 전통적인 한국화의 세계에 구도자적인 정신성과 이국적인 장식성을 융화시켜 새롭고 개성 있는 박생광 양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권동철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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