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짊어진 재상: 백사 이항복 종가 기증전, 4월 20일~9월 13일, 국립중앙박물관

(왼쪽)이순신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의 탑본, 조선 1614년 지음, 1681년 건립, 각 폭 215.6×101.2㎝<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이항복 위성공신 초상(부분), 조선 18세기 중반, 비단에 색, 156.3×86.2㎝<이근형 기증, 2019>.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1556~1618) 은 지혜와 기개로 1592년 음력 4월 13일 발발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재상이다. ‘시대를 짊어진 재상: 백사 이항복 종가 기증전’은 당색에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안위를 중시한 진정한 재상으로서 이항복의 역할, 삶과 문예세계, 후대의 평가 등을 다각도로 조망하는 최초의 전시장을 찾았다. 지난 4월 20일 오픈하여 9월 13일 까지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Ⅱ’ 에서 성황리 전시 중이다. 이번 전시는 2019년 11월 경주 이씨 백사공파 15대 종손 이근형(李槿炯) 선생이 종가에서 소중히 간직해 온 이항복 관련 중요자료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고 종가 기증품 17점과 국립중앙박물관소장품 12점 등 총 29점으로 구성됐다.

주요 전시품

▲평양성전투도=조명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한 승리를 그린 병풍이다. 임진왜란 극복에는 이항복과 같은 문신들이 외교관으로 큰 역할을 하였음을 느낄 수 있다. ‘징비록(懲毖錄)’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1593년 1월에 벌어졌던 평양성 탈환 전투를 후대에 재구성한 그림이다. 명나라 총병관(摠兵官) 이여송과 조선군의 공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이순신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의 탑본=경남통영 충렬사에 세워진 비석 앞뒷면의 탑본으로 임진왜란에서 목숨 바친 인물이 후대에 기억되도록 이항복이 지은 글이다. 노량해전의 전황과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동시대인의 안타까움이 잘 드러나 있다. 전서로 쓴 제목은 김수항(金壽恒,1629~1689), 본문 글씨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썼다. 다음은 비석의 탑본내용이다. “…새벽별이 솟자 양쪽 군대가 일제히 일어나서 일천 돛이 날아 춤추게 하였다. 공(이순신)이 맨 먼저 뛰어들어 기세를 타고 무너뜨리니, 적들이 개미떼처럼 흩어지며 살아남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전장의 북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장군별이 빛을 잃더니, 마침내 동틀 무렵에 공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공은 오히려 군중에게 경계하여 자신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하면서,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꺾일까 두렵다’하였다.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은 그 소식을 듣고 배에 몸을 세 번이나 부딪치며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단 말인가!’라 하였다. 명나라 군사들 또한 고기를 사양하고 먹지 않았다. 남쪽 백성들은 거리를 뛰어다니며 통곡하였고 글을 지어 제사지냈다. 남녀노소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는 광경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공 같은 사람이야말로 죽기로써 나라 일에 힘썼고, 큰 환란을 막아낸 인물이라 부를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으뜸 공신으로 책훈하고, 재상의 작위와 봉토를 내렸으며 초상을 그려 기린각(麒麟閣)에 걸어 영원토록 보답 받게 한 것이다…” ▲전적자료=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선생집(白沙先生集)’, 노나라 역사서 ‘노사영언(魯史零言)’, 사례(四禮)에 관한 정신적인 계몽서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의 전적 자료가 전시되어 그의 학문세계를 살필 수 있다. 한편 이항복은 62세에 인목왕후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여 삭탈관직을 당하고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63세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마지막 자취를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평양성전투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색, 175.0×388.0㎝. 국립중앙박물관.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권동철 미술전문기자 dckewon5131@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