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 출신 44%… 거수기·방패 역할

국내 10대 그룹 사외이사의 둘 중 한 명은 전직 장ㆍ차관 등 권력기관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8일 재계 정보 사이트인 재벌닷컴은 총수가 있는 10대 그룹 소속 상장사의 올해 정기주주총회 안건을 분석한 결과 이러한 결과를 도출했다고 밝혔다.

10대 그룹에 선임(신규ㆍ재선임) 예정인 사외이사 140명 중 국세청, 금융감독원, 판ㆍ검사, 공정거래위원회 등의 출신 인사는 61명으로 전체의 43.6%에 달했다. 특히 요직에 자리하던 장·차관 출신이 많아 사외이사 제도의 본질이 퇴색됐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장ㆍ차관 등 고위관료 출신 최다

출신별로 보면 정부 고위관료(장ㆍ차관 포함) 출신이 28명이었고 검사와 판사 출신이 17명, 국세청 출신이 7명, 금감원 출신이 6명, 공정위 출신이 3명이었다. 이 가운데 전직 장관 출신이 8명에 달해 이목을 끌었다.

고용노동부 장관, 기획재정부 장관 등을 지낸 박재완 전 장관은 삼성전자와 롯데쇼핑의 신규 사외이사로 영입됐다. 기획예산처 장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등을 지낸 박봉흠 전 장관은 삼성중공업 신규 사외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국토해양부 장관을 지낸 권도엽 전 장관은 GS건설, 기회재정부 장관을 지낸 윤증현은 전 장관은 두산인프라코어,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경한 전 장관과 김성호 전 장관은 각각 한화생명과 오리콤의 신규 사외이사로 영입됐다.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내고 2013년 삼성증권의 사외이사로 영입된 김성진 전 장관은 삼성증권의 사외이사로 재선임됐다. 2013년부터 (주)GS의 사외이사를 맡아온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 또한 임기가 3년 연장됐다.

판ㆍ검사 출신 중에는 박용석 전 대검찰청 차장이 롯데케미칼, 정병두 전 춘천지검장이 LG유플러스, 노환균 전 대구고검장이 현대중공업, 천성관 전 서울지검장이 두산건설, 채동헌 전 춘천지법 부장판사가 코스모신소재의 신규 사외이사로 등재됐다.

송광수 전 검찰총장은 삼성전자와 두산, 문효남 전 부산고검장은 삼성화재, 차동민 전 서울지검장은 두산중공업, 노영보 전 서울지법 부장판사는 (주)LG, 이석우 전 서울지법 부장판사는 대한항공, 석호철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한화테크윈의 사외이사로 재선임됐다.

국세청 출신으로는 이승호 전 부산지방국세청장이 현대모비스, 김영기 전 국세청 조사국장이 현대건설, 채경수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이 롯데칠성음료, 김용재 전 중부지방국세청 납세자보호담당관이 한화투자증권의 신규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2013년에 이어 임기가 3년 연장된 국세청 출신 인사로는 SK텔레콤의 사외이사인 오대식 전 서울지방국세청장, 두산의 사외이사인 김창환 전 부산지방국세청장, 현대비앤지스틸의 사외이사인 박외희 전 서울지방국세청 부이사관이 있다.

금감원 출신 중에는 문재우 전 금감원 감사가 호텔신라와 롯데손해보험 신규 사외이사로 선임됐고, 이장원 전 금감원 부원장과 김윤하 전 금감원 검사국장은 각각 롯데케미칼과 롯데하이마트 사외이사로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공정위 출신 가운데 김동수 전 공정위 위원장은 두산중공업, 안영호 전 공정위 상임위원은 LG화학의 신규 사외이사로 영입됐고, 황정곤 전 공정위 부이사관 경우 현대비앤지스틸의 사외이사에 재선임됐다.

한편 올해 선임된 관료 출신의 사외이사 가운데 2곳 이상에서 겸직하고 있는 인사는 39명으로 집계됐다. 김성호 전 장관 경우 (주)CJㆍ오리콤ㆍBNK금융지주 등 3개사에서 사외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그 외 박재완 전 장관(삼성전자ㆍ롯데쇼핑), 권도엽 전 장관(GS건설ㆍCJ대한통운), 박봉흠 전 장관(삼성중공업ㆍSK가스), 허경욱 전 기재부 차관(삼성생명ㆍGS), 오대식 전 국세청장(SK텔레콤ㆍ메리츠금융지주), 노영보 전 부장판사(LGㆍ현대중공업), 손병조 전 관세청장(삼성화재ㆍ현대정보기술)은 2개사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관료 출신, 대기업 거수기 전락

국내 10대 그룹 중 권력기관 출신의 사외이사가 가장 많은 곳은 롯데그룹이었다. 그룹별로 권력기관 출신을 살펴보면 19명 중 63.2%에 달하는 12명이 롯데그룹의 신규 또는 재선임된 사외이사였다.

이어 삼성그룹(61.9%), 두산그룹(61.5%), 현대자동차그룹·GS그룹(50%), 현대중공업그룹(40%), 한진그룹(33.3%), 한화그룹(30.8%), SK그룹(25.0%), LG그룹(17.4%) 순으로 올해 선임한 사외이사를 전직 관료로 채웠다.

이를 지난해 같은 조사와 비교했을 때 10대 그룹의 관료 출신 사외이사 비율은 5%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10대 그룹이 지난해 정기주총에서 선임한 사외이사 119명 가운데 47명(39.5%)이 권력기관 출신이었다.

그룹별로 보면 두산그룹은 9명의 사외이사 가운데 8명(88.9%)을 권력기관 출신으로 선임했다. 현대자동차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 한진그룹의 사외이사 중 관료 출신 비중은 각각 50.0%였다.

이외에 GS그룹(40.0%), 삼성그룹(39.3%), SK그룹(35.0%), 한화그룹(33.3%), 롯데그룹(30.8%)이 뒤를 이었다. 반면 LG그룹 경우 사외이사 13명 가운데 1명만 검찰 출신으로 선임해 권력기관 출신의 비중(7.7%)이 가장 낮았다.

이처럼 지난해에도 정부 고위직을 지낸 인사의 선임은 두드러졌다. 출신별로 살펴보면 장ㆍ차관 출신과 판ㆍ검사 출신이 각각 12명(66.7%)으로 다수를 차지했고 공정위(8명), 국세청(7명), 금감원(2명) 등이 뒤를 이었다.

일각에서는 전관예우 수단으로 전락한 사외이사 제도를 전반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벌닷컴 정선섭 대표는 <주간한국>에 "사외이사 제도는 1999년 도입 당시 총수나 대주주, 오너일가의 경영을 전문가가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그러나 권력기관 출신들이 기업에 가서 오너일가의 경영에 대해 뒷받침하는 등 거수기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며 "기업들 또한 외풍을 바람막이하기 위해 회사의 비용을 써 가면서 파워맨(권력기관 출신)들을 계속 영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권력기관 출신 또한 전문가이기 때문에 사외이사 제도에 어긋난 건 아니지만 제도의 본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며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 스스로도 도장만 찍어주는 역할을 하지 말고 경영진에게 잘잘못을 지적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윤소영 기자 ysy@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