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가 책임경영, 등기이사 등록만이 해답?… 안전장치 vs 무용론

지난 1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자동차 사옥 대강당에서 현대자동차 제48기 주주총회가 열리고 있다. 현대차는 주총에서 정의선 부회장을 사내이사로 재선임했다. 사진제공=연합
삼성 이재용, 올해 주총서도 등기이사 등재 안해
현대차 정몽구, 정의선 부자 등기이사 재선임
이부진, 삼성가 중 유일하게 등기이사직 올라
개정된 법으로 등기이사 안 올라도 '연봉 공개'
등기이사는 명목일 뿐… 책임경영과 관계 없다?

대기업 오너가의 등기이사 등재는 책임경영과 연결돼 재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 왔다.

특히 재계 순위 1위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의 등기이사 등재 여부는 주주총회 시즌마다 가장 큰 이슈가 됐다. 올해도 이 부회장은 등기이사직에 오르지 않았다. 대신 삼성은 이사회 의장을 이사진에게도 개방함으로써 주주의 권한을 강화하겠다는 안을 내놨다.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은 등기이사직을 그대로 이어갔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삼성가 삼남매 중 유일하게 등기이사직에 올라 있다.

등기이사 복귀를 통해 책임경영을 시사한 최태원 SK 회장은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SK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최 회장의 등기이사직 복귀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이사 사장이 지난 11일 서울 중구 삼성전자 장충사옥에서 열린‘호텔신라 주주총회’에 참석,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사진제공=호텔신라
오너가의 등기이사 등재가 곧 책임경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오너가가 대기업의 실질적 주인임을 온 세상이 다 아는 이상, 도의적 책임에서 벗어나긴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2월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한 자본시장법을 통해 등기이사직에 오르지 않아도 오너가의 연봉 공개가 가능하게 되면서 총수들은 적어도 연봉 공개가 부담스러워 등기 이사직에 오르지 않는다는 비난은 피할 수 있게 됐다.

이부진ㆍ정몽구ㆍ구본무, 등기이사 통해 책임경영 나서

국내 대기업의 경영권 승계는 거의 '혈연'으로 이뤄진다. 뚜렷한 경영 성과 없이 혈연을 내세워 대기업에서 주요직을 차지하지만 큰 권한만큼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일부 오너 패밀리 때문에 오너가 등기이사 등재 여부는 항상 주목을 받아 왔다.

3월 둘째 주와 셋째 주에 걸쳐 재계는 주주총회를 통해 기업의 큰 틀을 짰다. 이 자리에서 오너가 일원의 등기이사 등재와 재신임 여부가 큰 주목을 받았다.

재계순위 1위 삼성의 경우, 이건희 회장의 삼남매 중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만이 유일하게 등기이사 직에 올라있다. 이부진 사장은 지난 2011년 대표이사로 등기이사직에 이름을 올린 후 지난 2014년 연임했다. 이부진 사장은 오너가 중 유일하게 주주총회에 참석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호텔신라 주주총회에서도 주총 의장직을 맡아 5년 연속 회의를 주재했다.

재계 2위인 현대자동차는 정몽구 회장 부자가 나란히 등기이사직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번 주주총회를 통해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은 등기이사직에 재선임됐다. 정 부회장은 현대자동차 등기임원 외에도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기아자동차 등기임원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정몽구 회장 역시 등기임원직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최태원 ㈜SK 회장은 이번 주주총회를 통해 사내이사에 이름을 다시 올렸다. 등기임원 등록을 통해 책임경영을 확대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최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의 경우, 지난 2011년 분식회계건으로 구속 수감된 후 2014년 등기이사직을 내려놓은 바 있다.

LG그룹은 구본무 회장이 LG의 등기이사로 주주총회에서 재선임됐다.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또한 LG전자의 등기이사로 경영에 참여한 바 있으나 지난해 연말 정기인사에서 ㈜LG 신성장사업추진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진그룹의 경우 조양호 회장과 조원태 부사장이 한진, 한진칼, 대한항공 등기임원 직에 올라 있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상 배임 등의 혐의로 복역을 선고받았다 지난 2014년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등기이사직을 내려놓고 회장직만을 유지하고 있다. 김승연 회장의 장남 김동관 한화큐셀 전무는 2014년 한화큐셀 등기이사직에 이름을 올려놨다.

1세대 퇴장한 롯데, 4세대 등장한 두산

새로 등기이사직에 오르거나 이사직에서 퇴장하는 임원들을 통해 대기업의 세대 교체를 단편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다.

롯데그룹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49년만에 롯데제과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날 것을 시사하며 롯데그룹 세대 교체를 알렸다. 롯데제과는 지난달 25일 주주총회 소집 공고를 통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 대한 등기이사 재선임을 알렸다. 하지만 신격호 총괄회장의 경우 재선임 대상에서 빠졌다. 이는 신 총괄회장의 고령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성년 후견인 지정 재판 등을 고려한 판단으로 보인다. 신 총괄회장은 롯데제과 외에도 호텔롯데, 롯데쇼핑 등 6개 계열사 이사직에 올라있었는데 내년까지 모든 이사직에서 물러남으로써 퇴진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금호아시아나는 3세대 경영의 신호탄을 등기이사 등재로 알렸다. 지난 11일, 금호아시아나는 주주총회 예고 공시를 통해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장남 박세창 전략경영실 사장을 등기이사로 선임할 것이라 밝혔다.

두산그룹은 3세대 박용만 회장이 물러나고 4세대 박정원 회장이 그룹을 이끌게 된다. 박정원 회장은 두산에서 유일한 오너가 등기 이사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CJ 이재현 회장은 이번 주총에서 CJ와 CJ제일제당 등기이사직 재신임을 하지 않고 물러나는 방향을 택했다. 하지만 회장직은 그대로 유지한다. 타 계열사와는 달리 CJ는 CJ그룹 전체 지주사이고, CJ제일제당은 CJ의 모체 기업이다. 이러한 점을 살펴볼 때 이 회장의 등기임원 퇴진은 CJ의 세대 교체라는 큰 의미를 갖는 것으로 분석된다.

때마다 관심 끄는 '이재용 등기이사 등록'

반면 등기이사에 이름을 올리지 않아 비판받는 오너가의 일원들도 있다.

국내 대기업 오너들의 경우, 연봉 공개에 따른 부담과 법적 책임 등으로 등기이사 직을 내려놓는 사례가 점차 늘어나는 태세를 보여 왔다. 지난 2013년 개정된 자본시장법으로 연봉 5억원 이상을 받는 등기 임원들의 연봉이 공개되고 있다. 이러한 법 개정에 부담을 느끼고 2년 전부터 오너가 일원이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실제로 SK 최태원 회장의 경우 4개 계열사에서 총 300억원의 연봉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연봉킹'이라는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법적 책임 또한 오너가의 등기이사 등록을 망설이게 한다. 상법 399조에 따라 이사는 회사에 대한 일정한 의무를 지고 있다. 회사가 입은 손해액에 대한 배상과 연대책임부터 과실로 인해 임무를 지지 못했을 경우 그에 대한 손해를 배상하는 책임까지 갖고 있다. 이러한 여러 법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오너가가 등기이사에 등재하지 않는 '꼼수'를 부린다는 비판이 계속해서 제기되는 것이다.

국내 오너가 중 등기이사에 이름이 올리지 않은 대표적 인물은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의 주총 시, 과연 올해는 등기이사에 오를 것인가를 매년 주목받아 왔다. 올해도 이 부회장은 삼성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통합 삼성물산 등기 이사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에도 미등기 임원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이건희 회장의 차녀인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경영기획 사장 역시 미등기 임원이다.

범삼성가인 신세계는 이명희 회장부터 정용진 부회장, 정유경 사장이 모두 등기이사에 취임하지 않았다.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은 올해도 역시 등기임원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 정 부회장은 지난 2013년 '일감 몰아주기' 의혹을 받고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신세계그룹의 경우 이명희 회장 역시 등기이사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미등기 임원이다.

경영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날 것을 시사한 경우도 있다. 지난 3일,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은 현대상선의 유동성 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현대상선 등기이사와 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현 회장이 등기이사직을 내려놓은 것은 최근 현대상선이 겪고 있는 유동성 악화에 따른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등기이사'가 의미하는 경영 책임을 보여주는 단편적 예이다.

등기이사에 오르지 않는 오너들에 대한 비판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막대한 권한을 누리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오너가를 향한 시선은 곱지 않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개정된 자본시장법에 따라 오너가 일원들은 등기이사에 등재되지 않아도 연봉 공개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지난 2월 18일, 자본시장법 개정안 중 '임원 개별보수 공개 개정안'이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 회의를 통과하면서 오너가의 연봉을 공개할 수 있게 됐다. 정무위는 여야의 개정안을 통합해 공개대상을 임직원을 포함한 상위 5인으로 확대하고, 공개 횟수는 연 2회로 축소해 반기와 사업보고서에 제출토록 하는 타협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은 즉각 반대 의사를 표현했다. 전경련은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코스닥협회와 공동 보도자료를 내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전경련은 "개인 연봉공개는 개인 정보의 공개로 사생활 비밀 침해의 우려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임직원 여부를 떠나 상위 5인을 무조건 공개하는 경우, 성과를 내 많은 급여를 받은 직원들까지도 공개대상에 포함된다"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재계는 또 주요국에선 임원개별보수 공개가 회사의 투명성 제고나 실적개선과는 상관성이 적다는 연구 결과와 연봉이 공개된 임원들이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반대 근거로 들었다.

개정법에 따라 오너가는 연봉 공개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재계는 반재벌 정서가 확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따르면 2014년 기준으로 대규모 기업집단의 지배주주 경영자의 평균보수는 18억2000만원으로 전문경영자들의 평균인 13억7000만원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법적 결함 가진 총수의 등기이사 등재, 막아야 하나?

하지만 등기이사 등재가 책임경영과 큰 상관이 없다는 반론도 있다. 특히 도의적 문제를 일으킨 총수의 경우, 등기이사직에 오르는 것을 재고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SK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은 SK 최태원 회장의 등기이사 복귀에 반대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SK의 최대 주주는 최태원 회장으로 23.4%, 국민연금이 2대 주주로 9.4%의 지분을 갖고 있다. 지분으로 볼 때 국민연금이 반대의사를 표명하더라도 최태원 회장과 7.46%의 지분을 갖고 있는 최기원 이사장 등 관계인의 지분이 30%가 넘어 등기이사 복귀는 차질 없이 이뤄졌다. 또 법적으로도 금융회사가 아닌 이상, 전과 여부를 통해 이사직의 자격을 제한할 수 없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반대로 '상처 뿐인 복귀'를 이루게 됐다.

국민연금의 최 회장 등기이사 복귀 반대는 법령상 이사로서의 결격 사유가 있는 자의 사내이사 후보 안건을 반대할 수 있다는 근거에 따라 이뤄졌다. 최 회장은 횡령과 배임 혐의로 두 번의 유죄 판결을 받은 전력이 있다. 올 초에는 혼외자 문제로 사생활과 관련된 구설수에도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여러가지 결격 사유를 갖고도 책임경영이라는 명목 하에 등기이사 복귀를 준비하는 데 부정적 의견이 대두되자 국민연금은 최 회장의 등기이사 복귀를 반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리 오너가의 책임 경영을 요구하지만 최 회장의 경우처럼 법적, 도덕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오너가의 등기이사 등록은 옳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려 공식적인 권한을 갖게 하는 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오너가의 경우, 등기이사로 올라있지 않아도 지분을 통해 기업에 영향력을 미칠순 있다. 하지만 주주로서의 권한은 어디까지 주주총회에서만 그치지만 등기이사의 경우 더 '공식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정상적인 오너가 경영자는 등기이사를 통해 책임경영을 이룰 수 있지만 최 회장과 같이 결격 사유를 갖고 있다면 등기이사 복귀를 막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등기이사가 곧 책임경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오너가의 경영권 세습이 이뤄지는 국내 대기업의 경우, 기업을 소유한 자가 곧 경영에 참가하게 된다. 이 때문에 등기임원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오너가가 지배하고 있는 모든 계열사에 등기임원으로 등록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개정된 자본시장법에 따라 앞으론 등기이사에 오르지 않아도 연봉이 공개된다. 따라서 오너가 총수들은 적어도 연봉 공개의 부담을 느끼고 등기이사에 등재하지 않았다는 비판에선 자유로울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여러 총수들이 향후 등기이사로 새롭게 등판할지, 혹은 자리를 내려놓는 방향을 선택할지 주목된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