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그들만의 혼사’…최근 실익보다 사랑 우선 추세

삼성-LG, 재벌가 사돈의 원조… 재벌 간 겹사돈 되기도

현대그룹, 사돈과 합병 통해 해운업 토대 마련

SK, 대통령과 사돈 맺으며 크게 성장…효성가 MB와 사돈

사돈 관계로 시너지ㆍ화해 효과…라이벌 관계, 갈등 빚기도

3ㆍ4세대, 정략결혼보다 연애결혼 선호…새 혼맥지도 형성

대한민국 재벌가에게 자녀들의 혼사는 또 다른 사업 영역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사돈을 맺음으로써 입지를 견고히 다질 수 있다.

라이벌 구도였던 기업이 사돈을 맺으며 화해 관계에 들어가기도 한다. 또 한편으론 사돈으로 좋았던 관계가 중복된 사업 영역 진출로 갈등을 빚기도 한다. 특히 정계, 언론계와 사돈을 맺으며 영역을 공고히 다지는 경우도 있다. 든든한 사돈은 곧 기업 발전의 가장 큰 지원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예전과 같은 정략결혼은 줄어드는 추세다. 연애 결혼이 대세가 된 것이다.

창업주 자녀들, 결혼 통해 사업 근간 마련

지난 15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이날은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의 외손자이자 정성이 이노션 고문의 아들인 선동욱(28)씨와 채형석 애경그룹 부회장의 딸 채수연(26)씨가 백년가약을 맺는 날이었다. 이로써 재계 2위인 현대자동차 그룹과 중견그룹 애경이 혼맥으로 이어지게 됐다.

재벌가의 혼사는 남녀가 가정을 꾸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자녀들의 결혼을 통해 대기업 간 관계를 공고히 다지기도 하고, 정계 및 언론계와 혼맥을 맺으며 사업 확장을 도모하는 경우가 많다.

삼성과 LG는 재계간 혼인의 원조 격이다. LG 구인회 창업주의 삼남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삼성 이병철 창업주의 셋째 딸 이숙희씨가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구지은 아워홈 부사장은 외가는 삼성, 친가는 LG라는 막강한 배경을 갖게 됐다. 삼성과 LG가 사돈을 맺은 당시에도 ‘재계 쌍두마차가 사돈을 맺었다’며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한때는 사돈을 맺을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던 삼성과 LG의 ‘우호 관계’는 1969년 삼성이 전자 사업 진출을 선언하면서 틀어지게 됐다. 구자학 회장이 이숙희씨와 결혼 후 삼성 에버랜드 등 계열사에서 일한 적도 있지만 삼성의 전자사업 진출 후 LG가로 돌아갔다. 이후 이숙희씨는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과 함께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유산 상속 소송을 제기했다. 이건희 회장은 이숙희씨에 대해 “결혼 전에는 애녀(愛女)였지만 금성(LG의 옛날 이름)으로 시집간 후, 삼성이 전자사업에 진출하자 (시댁에서) 구박을 받는다며 떼를 썼다”고 말했다. 이후 삼성과 LG는 스마트폰 및 가전 제품 등 전자 사업 분야에서 라이벌 구도를 현재까지 계속 구축하고 있다.

라이벌 기업이 사돈을 맺은 경우도 있다. 조미료 시장에서 ‘미원’과 ‘미풍’을 통해 대결을 펼쳤던 대상과 삼성그룹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임세령 대상그룹 상무의 결혼으로 사돈 지간이 됐다. 생전에 이병철 창업주는 ‘미풍’이 ‘미원’을 이기지 못한 것에 대해 “자식과 골프를 포함해 내 생애 맘대로 안됐던 세 가지 중에 하나”라 언급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 부회장과 임 상무는 결혼 11년만인 지난 2009년 이혼했다.

현대그룹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5남 고 정몽헌 회장과 신양상선 현영원 회장의 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혼사가 눈에 띈다. 양가의 혼사와 함께 1984년 해운합리화 조치에 따라 현대상선과 신양상선이 합병했고, 이를 토대로 현대상선은 오늘날 세계 16위 선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현재 유동성 위기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현 회장이 현대상선을 포기할 수 없는 건 이와 같은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사돈을 맺으며 기업의 뿌리를 다진 구씨 일가와 허씨 일가도 빼놓을 수 없다. LG그룹 구인회 창업주는 부호 허만정씨의 딸 허을수씨와 결혼했다. 구씨가와 허씨가는 사돈을 맺으며 LG그룹과 GS그룹의 모태인 ‘럭키금성’을 탄생시켰다. 이후 허씨 일가가 GS로 독립하면서 각자의 길을 걷게 됐지만 잡음 없는 이별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결혼을 통해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영향력을 넓힌 경우도 있다. 재계 5위 롯데그룹이다. 신동빈 회장은 대형 건설사 다이세이의 부회장의 딸 시게미쓰 미나미와 결혼했다. 시게미쓰 미나미씨는 한 때 일본 왕실 며느리 후보로도 거론될 만큼 영향력 있는 가문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명문가와의 혼사로 롯데는 일본에서의 입지를 더 강하게 다질 수 있었다.

재벌가 3ㆍ4들 재계 혼맥 이어져

최근 ‘운전기사 갑질’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른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과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사장도 재벌가와 혼맥을 이루고 있다.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의 장남인 이해욱 부회장의 부인은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장녀 훤미씨의 외동딸 김선혜씨다. 이들은 친지의 소개로 만나 수년간 연애 끝에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일선 사장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4남 몽우(전 현대알루미늄 회장)의 장남으로 구자엽 LS전선 회장의 장녀 은희씨와 혼맥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각각 심리학과 경영학을 공부하던 중 만나 1996년 결혼했다. 정일선 사장의 친동생은 정대선 현대 비에스앤씨 사장으로 2006년 8월 노현정 전 KBS 아나운서와 결혼했다.

손경식 CJ그룹 회장의 장남인 손주홍 조이렌트 대표는 노스페이스, 나이키, 리복 등의 제조업체로 유명한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의 3녀 가은씨와 혼인했다. 두 사람은 중매로 만나 수개월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고 한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일가도 탄탄한 혼맥을 자랑한다. 친형인 고 박성용 명예회장의 장남인 재영씨는 구자훈 LIG그룹 전 회장의 3녀인 문정씨와 결혼했다. 고 박정구 금호그룹 회장의 장녀 은형씨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차남 김선협씨와 혼인했고, 차녀 은경씨는 동국제강 가문의 방계인 장상돈 한국철강 회장의 아들인 장세홍 한국철강 대표에게, 삼녀 은혜씨는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의 차남 허재명 일진머티리얼 대표에게 시집갔다.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의 장남 조현준 효성 사장은 이희상 운산그룹 회장의 막내딸인 미경씨와 결혼했고, 차남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은 이부식 전 해운항만청장의 장녀인 여진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코오롱그룹 창업주인 고 이원만씨의 막내딸 미향씨와 삼립식품 고 허창성 창업주의 둘째 아들 허영인 SPC 회장은 부부로, 아들 허진수 SPC 부사장은 이생그룹 박용욱 회장의 딸 효원씨와 결혼했다.

대통령 사돈 얻고 힘 받기도… 언론계 혼사도 주목

대기업과 정치권의 인연 역시 혼맥으로 맺어지곤 한다. 특히 대기업 중에선 ‘절대 권력’인 정계와의 혼사를 통해 사업을 발전 시킨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는 SK 최태원 회장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나비관장의 혼사다. 두 사람의 결혼은 대통령의 딸과 재벌가 아들의 만남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최 회장의 혼외자 파문으로 이혼 위기를 겪었던 두 사람이지만 현재 부부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노 관장과의 결혼은 재계 순위 10위였던 선경을 오늘날 3위인 SK로 성장시켰다. SK는 지난 1980년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 인수로 석유 분야에 진출했다. 1992년에는 제 2통신사 선정을 통해 ‘사돈 특혜’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꾸준한 통신사업 투자로 현 SK텔레콤의 토대를 마련했다. 섬유기업이었던 선경이 오늘날 석유 화학과 통신을 아우르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대통령 사돈의 영향력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최근에 이뤄진 재계-정계 혼사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셋째 딸 이수연씨와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의 아들 조현범 사장의 결혼이다.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은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동생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은 넓게 보면 효성가와도 혼맥으로 연이 닿은 셈이다. 이후 조현범 사장의 주가조작이 무혐의로 판결 나면서 또 다른 정경유착이 아니냐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역시 포스코, 동아원과 사돈을 맺으며 혼맥을 형성했다.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의 장녀 성은씨는 구자두 LG인베스트먼트 회장의 장남 구본천 LG인베스트먼트 사장과 결혼해 LG가와 혼맥을 이루고 있다.

언론계와 재계의 혼사도 빼놓을 순 없다. 특히 삼성그룹의 경우 이건희 회장의 아내 홍라희 리움미술관 관장이 홍석현 중앙미디어네트워크 회장의 누나로 중앙일보와 연을 맺고 있다. 또 이건희 회장의 차녀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이 동아일보 김재호 사장의 동생 김재열씨와 결혼했다.

GS그룹 일가도 언론계와 혼맥을 이루고 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사촌형인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의 장남 허서홍 GS에너지 전력ㆍ집단에너지 사업부문장(상무)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장녀 정현씨와 2007년 5월 결혼했다. 이에 앞서 허 회장의 장녀 유정씨는 2000년 5월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장남 준오씨와 결혼했다.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의 삼남 조현상 효성 부사장은 김여송 광주일보 사장 딸인 유영씨와 결혼했다.

실익보다는 사랑 좇는 3ㆍ4세

재벌가 3ㆍ4세대의 결혼은 과거처럼 사업적 이익에 기반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자녀들의 선택에 따라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CJ 이재현 회장의 장남 이선호 CJ제일제당 과장은 그룹 코리아나의 보컬 이용규씨의 딸 이래나씨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미국 유학 중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현 회장의 장녀 경후씨도 평범한 집안의 아들인 정종환씨와 결혼했다. 정씨는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뉴욕 시티은행에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상그룹 차녀 임상민 상무는 5살 연하의 금융인 국유진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두 사람은 사교 모임을 통해 만났다. 국유진씨의 근무처가 뉴욕이라 임상민 상무 역시 대상 뉴욕 지사로 건너가 신접 살림을 차렸다.

이선호 과장과 임상민 상무는 그룹의 차기 후계자로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CJ는 이재현 회장의 건강이 좋지 않아 후계 구도를 일찌감치 구축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임상민 상무는 언니 임세령 상무보다 대상 계열사의 더 많은 지분을 갖고 있다. 그러나 결혼으로 인해 승계 작업은 잠시 미뤄지게 됐다. 결혼과 동시에 두 사람 모두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기 때문이다.

두산그룹 3ㆍ4세대 중엔 재벌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상대와 혼인한 경우가 많다.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녀 박혜원 오리콤 부사장은 의사인 서경석씨와 결혼했고,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회장은 평범한 집안 출신인 서지원씨와 혼인했다.

박용성 전 회장의 두 아들 박진원 전 두산 사장, 박석원 두산엔진 부사장과 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의 세 아들인 박태원 두산건설 사장, 박형원 두산인프라코어 부사장, 박인원 두산중공업 전무 등은 모두 평범한 집안 출신과 결혼했다.

연애결혼이 잦아지는 추세지만 어울리는 인맥의 범위가 한정돼 있다 보니 결국은 부유층의 자녀들끼리 결혼하게 되는 건 당연지사다. 평범한 집안으로 알려졌던 오너가의 배우자들은 금융인, 교수, 중견기업 사업가의 자제들인 경우가 많다.

이제 막 결혼 적령기를 맞이한 3ㆍ4세 오너가 자녀들은 해외 명문대 유학을 통해 만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는 두산 박서원 전무와 LS가의 구원희씨다. 두 사람은 미국 유학 중 만나 연애한 후 2005년 결혼했으나 5년 만에 이혼했다.

학교 동창과 연애 결혼하는 재벌가 3ㆍ4세들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정유경 신세계백화점 사장은 경기초교 동창인 문성욱 신세계 인터내셔날 본부장과 결혼했다.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 역시 초등학교 동창인 성형외과 의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박세창 금호타이어 부사장은 중학교 동창 김현정씨와 연애 결혼했다.

이제는 재벌가 자녀의 예비 배우자를 소개할 때 ‘모 그룹 회장의 딸’보단 ‘금융인’, ‘미국 명문대 재원’이라는 수식어를 더 많이 볼 수 있게 됐다. 정략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만연하고, 자유롭게 성장한 3ㆍ4세대에선 연애결혼이 ‘대세’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혼맥이 기득권층의 힘을 유지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임은 부정할 수 없다. 재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연애결혼으로 알려진 몇몇 재벌가 자제들의 결혼 또한 ‘실은 정략 결혼’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제 막 경영권 승계에 발을 들인 80~90년대생 3ㆍ4세대들은 대다수가 미혼이다. 따라서 이들이 어떠한 결혼을 해 새로운 재계 혼맥 지도를 완성해 나갈지 관심이 쏠린다.

이명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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