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건 다 팔아, ‘이재용 시대 밑거름’마련

태평로 빌딩 매각, 서초 입주 계열사 이전으로 바쁜 행보

제일기획 매각, 속도 더뎌

이 부회장, 통합 삼성물산 지분 강화로 ‘한 걸음 전진’

해가 바뀌었지만 삼성그룹의 매각 행보는 현재진행형이다. 매각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인적 규모를 줄인 것은 물론, 부동산 매각을 통해 계열사들을 재배치했다. 비주력 계열사에 대한 과감한 매각이 선행됐음은 물론이다.

화학 방산 계열사를 롯데와 한화에 넘기고, 현재 제일기획 매각까지 진행 중이지만 아직까지 매각 시나리오가 끝나지 않았다는 설이 끊이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특히 실질적인 그룹 지주사 역할을 하고 있는 통합 삼성물산의 계열사 정리가 다음 차례로 꼽힌다고 한다.

부침 겪는 제일기획 매각

서울 태평로의 ‘삼성 금융타운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이제 태평로에는 삼성 소유의 건물이 본관만 남게 됐다.

삼성그룹은 지난 1월, 태평로 삼성생명 사옥을 5000억원에 부영 그룹에 매각했다. 매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는 7월, 태평로 빌딩 또한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매각 주관사는 신영에셋과 에스원으로 선정했다.

서초 타운 역시 사라졌다. 삼성그룹의 상징적 의미를 갖던 서초타운에 입주해 있던 전자, 금융, 생명 계열사 직원들은 지난 연말부터 수원디지털시티, 우면동 연구개발센터, 서울 태평로로 옮겨갔다. 현재 전자 사옥에 입주해 있는 직원들은 미래전략실 임직원들과 일부 계열사 직원들뿐이다. 대대적 감원 역시 필수다. 지난해 연말 인사 이후 임원 500여명이 회사를 떠났으며 일반 직원들의 감원 규모 또한 1년새 7000여명을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제일기획 매각은 지지부진하다. 삼성그룹은 프랑스 광고 회사 퍼블리시스와 제일기획 매각을 추진해 왔다. 외신에 따르면 지난달 22일 퍼블리시스 모리스 레비 회장은 퍼블리시스의 1분기 실적 발표 기업 설명회(IR)에서 제일기획 매각 과정에 대해 “부침이 있었는데 현재는 정체기에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광고업계에서는 퍼블리시스의 제일기획 인수가 매각 차이로 인해 결렬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퍼블리시스 회장의 발언은 제일기획 매각설이 공식적으로 언급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다만 제일기획 매각은 한동안 정체를 겪을 것으로 보인다. 와중에 제일기획은 영국의 B2B(기업 간 거래) 마케팅 전문기업인 파운디드를 인수해 업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임대기 제일기획 사장은 이에 대해 “파운디드는 B2B 마케팅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회사로 사업영역을 다각화할 수 있기 때문에 계획했던 걸 실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파운디드 인수가 제일기획 매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국내 광고업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삼성은 지난해부터 매각을 통한 자산확보에 들어갔다. 매각 대상은 계열사를 넘어 부동산까지 가리지 않는다. 한 언론은 삼성그룹이 이병철 명예회장 시절부터 상징적 의미가 큰 호암아트홀까지 매각한다는 보도를 했다. 삼성그룹은 이에 대해 즉각 부인했으나 그만큼 삼성을 둘러싼 ‘매각설’은 주체만 변할 뿐 다양하게 흘러 나오고 있다.

지난해 통합 삼성물산 출범으로 지주회사 전환으로의 1단계를 준비한 삼성이 그리는 큰 그림은 전자와 금융을 중심으로 양대 축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주력 계열사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의 정리와 함께 지주회사 전환을 위한 자산이 필요하다. 최근 공격적인 매각은 삼성이 그리는 큰 그림을 향한 밑거름이라는 것이다.

다음 매각 대상은 삼성물산?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꾀하는 건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력을 강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은 2년 넘게 와병 중이다. 건강을 회복한다고 해도 70대의 고령인 이 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삼성이 이제 이재용 시대를 준비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 부회장의 지분 확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삼성물산의 지분 확보가 필수적이다. 통합 삼성물산 출범으로 사실상 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게 된 삼성물산이다. 이 부회장은 통합 삼성물산 출범과 동시에 16.5%의 지분을 확보했었다.

최근 이 부회장의 삼성물산 보유 지분이 0.2%로 상승했다. 이 부회장 등 삼성가 삼남매가 이건희 회장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내야 하는 상속세는 약 6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 이재용 부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SDS 주식을 팔아 현금을 마련할 것이라는 예측이 높았다. 그런데 지난 1월, 이 부회장이 삼성엔지니어링 유상증자를 위해 삼성SDS 지분 2.05%(158만7757주)를 처분했다. 매각 이후에도 삼성SDS 최대 주주이지만 경영난에 빠진 삼성엔지니어링을 구하기 위한 책임경영에 나섰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삼성엔지니어링 구주주 청약률이 99.9%에 이르면서 실권주가 발생하지 않아 유상증자에 참여하지 못했다. 결국 이 부회장은 지난 2월, 2000억원 규모의 삼성물산 주식과 302억원 규모의 삼성엔지니어링 자사주를 취득해 삼성물산 보유 지분율을 17.2%로 높였다. 순환출자를 해소했다는 명분과 동시에 지주사에 대한 지분을 높인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결국 삼성이 진행하는 모든 매각 시나리오는 이 부회장 시대를 열기 위한 기초 공사”라고 지적했다.

삼성그룹의 매각 시나리오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올 초만 해도 해양플랜트 수주 부진으로 대대적인 불황을 겪고 있는 삼성중공업에 대한 합병 및 해외 기업 매각설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과의 합병설로 실체를 드러냈으나 정부 차원에서 합병은 없다고 못 박았고 삼성중공업 역시 대우조선 인수에 대해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지주사 삼성물산에 대한 합병 및 매각설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건설부문 매각, 플랜트 부문을 분리한 후 삼성엔지니어링과 합병 등 다양한 ‘쪼개기’ 시나리오가 오가고 있다. 이는 현재 건설, 레저, 패션, 바이오 등 다양한 사업 분야를 맡고 있는 삼성물산에게 주력 분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개편이 이뤄져야 한다는 해석에서 출발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의식한 탓인지 지난달 26일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의 김종중 전략팀장(사장)이 삼성의 추가적인 계열사 재편작업은 없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 주목받았다. 김 사장은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10대 그룹 최고경영자(CEO) 간 간담회에 참석한 뒤, “이제 더 정리할 계열사나 사업은 없다”면서 “(삼성의 사업재편은) 마무리됐다고 보면 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당분간은 없다’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삼성그룹이 지난해부터 공격적으로 진행해 온 사업 개편 행보를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아직까진 더 우세하다.

이명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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