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삼성 품 안긴 제일기획, 관건은 ‘독자 생존’

퍼블리시스와의 매각 협상, ‘없던 일’

삼성 계열사 광고 물량에 기대지 않는 방법 찾아야

VR·해외 네트워크 확보로 신성장동력 구축해야

지지부진했던 제일기획의 매각이 결국 ‘없던 일’이 됐다. 프랑스 광고회사 퍼블리시스와의 매각 협상이 결렬되면서 제일기획은 다시 삼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국내 최대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의 매각은 삼성그룹의 실용주의 행보로부터 시작했다. 삼성은 2014년부터 방산, 화학 계열사를 한화와 롯데에 매각했다. 이러한 매각 행보에 광고 계열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일단 매각 협상이 백지화되면서 제일기획은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아직까지 모기업 계열사의 광고 일감에 의존하는 체제를 바꿔야 한다. 독자생존 방법을 찾는 것은 제일기획 앞에 놓여진 가장 큰 숙제다.

제일기획의 매각이 백지화된 이유는

약 3개월간 끌어온 제일기획과 프랑스 광고회사 ‘퍼블리시스’의 매각 협상은 결국 없던 일이 됐다. 제일기획은 지난 13일, 공시를 통해 “주요 주주와 글로벌 에이전시들과의 기존 다각적 협력방안 논의는 구체적 결론 없이 결렬됐고 현재 당사 주요 주주는 다각적 협력 및 성장 방안과 관련해 제3자와 특별히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 없음을 확인한다”고 밝혔다.

3개월 간 매각 여부에 불안해 하던 제일기획 임직원들은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국내 재계 순위 1위 삼성그룹을 떠나 외국 광고회사에 인수된다는 것은 임직원들 입장에서도 반가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임대기 제일기획 사장은 매각 무산 발표 후 임직원들에게 편지를 보내 “근거 없는 소문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업무를 수행해준 임직원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더 이상 흔들리지 말고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가자”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선 “좋은 사람은 공격적으로 뽑고 필요한 부분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이번 제일기획 매각 무산 배경으로 스포츠 구단이 걸림돌이 되지 않았냐고 보고 있다. 삼성그룹은 산하 스포츠팀을 모두 제일기획 소속으로 이관했다. 프로야구팀 삼성라이온즈를 비롯해 프로축구단 삼성블루윙즈, 남자 프로농구단(썬더스), 여자 프로농구단(블루밍스), 남자 프로배구단(블루팡스) 등 다섯 개의 스포츠팀이 올해 초까지 제일기획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모기업의 지원에 의지하는 국내 스포츠단의 특성상, 외국 광고 회사의 국내 스포츠단 인수는 단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홍보 효과를 노릴 수 있는 국내 대기업과는 달리 마케팅 면에서도 이득을 볼 수 있는 게 없고, 경영 또한 적자 형태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매각이 진전을 보이지 않자 제일기획 측이 매각 성사를 위해 스포츠단의 법인 분리를 추진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제일기획 측은 지난 10일 공시를 통해 “스포츠단 법인 분리를 추진하지 않고 있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스포츠단 매각을 검토하기도 전부터 제일기획 매각 협상은 틀어진 것으로 보인다.

갤럭시S7 출시와 제일기획 실적의 상관관계

제일기획의 올 1분기 실적은 다소 하락했다.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6.9% 감소한 224억원으로 공시됐다. 매출액은 전년 동기보다 14.63% 늘어난 6593억원이었다. 1분기 실적이 다소 하락하긴 했으나 그동안 제일기획은 쏠쏠한 실적을 거둔 ‘알짜배기’ 계열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기획이 매각 대상 명단에 오른 것은 금융과 전자를 필두로 하는 삼성그룹의 재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비주력 계열사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인사에서는 오너가인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이 겸직하던 제일기획 사장직을 물러나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재계에서는 이 시점부터 삼성그룹이 제일기획 매각을 고려했다고 보고 있다.

대기업 광고 계열사들은 모기업 계열사의 광고 물량에 의존한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올해 1분기 제일기획의 전체 광고 물량 중 72%는 삼성그룹 계열사 물량으로 집계됐다. 제일기획은 지난 2014년부터 꾸준히 70% 가량의 물량을 삼성그룹 광고로 소화해 왔다. 실제로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 S’의 신제품이 출시돼 광고가 많아지는 시기엔 제일기획의 영업이익 역시 동반 상승했다.

삼성그룹 역시 이러한 한계점을 잘 알고 있다. 재계에 따르면 삼성그룹은 최근 제일기획 매각 철회에 이어 제일기획의 역량 강화를 위한 경영 진단과 컨설팅을 실시할 예정이다. 이는 그룹 차원에서 제일기획의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글로벌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조치로 풀이된다.

긍정적인 요소는 있다. 제일기획의 자회사인 아이리스, 펑타이 등 자회사가 처리하는 삼성그룹 광고 물량의 경우 2014년 78%, 2015년 63%에서 올 1분기 61%까지 감소했다. 해외 광고주들의 확보를 통해 제일기획의 독자 생존력이 점점 살아나고 있다는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대기업 광고 계열사가 모기업 광고를 맡는 것은 이른바 ‘일감 몰아주기’ 논란을 항상 동반했다. 제일기획 역시 ‘일감 몰아주기’ 역풍이 불자 지난 2014년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광고를 TBWA에 내준 바 있다. 제일기획 외에도 현대자동차 그룹의 이노션, 두산그룹의 오리콤까지 대기업 광고 계열사들은 일감 몰아주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성그룹 역시 제일기획에 부담을 느꼈다는 해석이 나왔다.

일단 삼성그룹 측은 당분간 제일기획 매각 카드를 꺼내지 않을 예정이다. 퍼블리시스와의 매각이 결렬된 후 적절한 매각 주체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당초 새로운 매각 협상자를 찾아낼 것이라는 기존의 관측과는 차이가 있다. 대신 제일기획은 계열사 광고 의존도를 차차 없애는 쪽으로 독자 생존을 추진하는 방법을 택할 것으로 보인다.

신규 먹거리 발굴, 제일기획도 예외 아냐

제일기획은 광고 말고도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하며 돌파구를 찾을 예정이다. 그 핵심 사업은 VR(가상현실)이다.

제일기획은 6월 말까지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사옥 로비에 VR 체험공간을 설치해 운영한다. 이는 광고주에게 제일기획의 VR 마케팅 역량을 알리기 위해서다. 이 뿐만 아니다. 지난해부터 제일기획은 삼성전자의 다양한 VR프로젝트에 참여해 왔다. 올해 열린 ‘CES 2016’과 스마트폰 갤럭시 S7 공개 행사에서도 VR 체험 공간을 구축해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VR은 향후 제일기획의 신규 사업군의 핵심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해외 비중도 더 늘려갈 계획이다. 제일기획은 당초 프랑스 광고회사 퍼블리시스와의 협상을 통해 영미권 광고주들과의 접촉을 늘리려 했다.

이미 제일기획은 해외 자회사를 통해 매출액의 70%를 해외에서 벌어들이고 있다. 현재 운영 중인 제일기획의 외국계 자회사로는 지난 2009년 중국에서 인수한 디지털 마케팅 기업 ‘펑타이’를 먼저 꼽을 수 있다. 제일기획은 펑타이의 지분을 98% 보유하고 있다. 펑타이는 중국 디지털광고 시장에서 점유율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제일기획의 영국 자회사 ‘아이리스’는 지난 4월 영국 B2B 마케팅 전문회사 ‘파운디드’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제일기획 측은 인수를 통해 B2C(기업과 소비자간 거래) 마케팅 중심으로 구축한 해외 사업 포트폴리오를 기업과 기업간 거래까지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당시 임대기 제일기획 사장은 “제품기술이 평준화되고 영업경쟁이 심화되면서 B2B 마케팅 서비스에 대한 기업들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있어 인수를 결정했다”며 “B2C 분야와의 시너지를 통해 기존 고객에 대한 대행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신규고객 영입에 속도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제일기획은 2014년 마케팅기업 아이리스 인수 전에도 2008년 신행 광고대행사 BMB를 인수해 영국 마케팅 기업들을 연이어 자회사로 삼으며 해외에서 제일기획 영향력을 높이는 것에 몰두해 왔다.

매각이라는 큰 고비를 넘긴 제일기획은 자생력 강화에 중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의 실용주의 행보가 아직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 생존 없이는 제일기획의 미래를 그 누구도 장담할 순 없다.

이명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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