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 가문의 ‘주인의식’은 강점…경영권 분쟁 등 ‘위험요소’도 상존

우리나라 재계의 ‘세대 교체’가 활발하다. 주요 대기업 그룹을 중심으로 창업자 세대 대다수가 역사 속으로 퇴장한 가운데 2~3세대 경영자를 넘어 4세대 경영자들도 경영 일선에 등장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대기업 오너 일가의 경영권이 일반적인 ‘장자(長子) 승계’가 아닌 ‘형제경영’ 혹은 ‘사촌(형제)경영’ 등의 형태로 이어지는 양상도 늘어나고 있다. 이런 경영체제는 일부 기업에서 ‘가족경영’이나 ‘가문경영’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물론 이따금 경영권을 둘러싸고 혈족끼리 분쟁을 벌이는 사례도 발생한다. 그렇다면 형제경영이나 가족경영은 현실 속에서 어떤 모습을 나타내고 있을까. 또 경영성과 측면에서는 어떤 성적표를 받아 들고 있을까.

형제경영, 사촌경영 등 '가족경영'은 투철한 주인의식, 신속한 의사결정, 장기적 안목의 경영 등이 장점으로 꼽히지만 가족간의 갈등이나 경영권 분쟁 등 오너 리스크 요인은 단점으로 지적된다.

올해 취임 20주년을 맞이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큰 화제를 뿌렸다. SK그룹을 지배하는 데 주춧돌 역할을 하는 지주회사 SK㈜의 자기 소유 주식 329만주를 친동생과 사촌형제 등 친족들에게 나눠주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SK그룹에 따르면 최태원 회장은 지난 11월 21일 해당 주식을 친족들에게 증여했다. 그 전날 증시 종가 기준으로 9000억원이 넘는 막대한 규모다. 최태원 회장은 자신의 주식을 친족들에게 증여한 배경에 대해 “지난 20년간 형제 경영진이 함께하며 성원하고 지지해준 데 대한 보답”이라고 밝혔다.

이번 증여 전에 최 회장이 보유한 SK㈜ 주식은 1646만주(지분율 23.4%)에 달했다. 그런데 지분율 4.68%에 달하는 329만주를 형제들에게 증여함으로써 최 회장의 SK(주) 지분율은 18.72%로 줄어들게 됐다. 지분율이 줄어든다는 것은 지배력이 약해지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 때문에 최 회장의 주식 증여는 국내 재계 풍토에서 극히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그간 국내 재벌그룹 가문에서는 경영권 분쟁이나 재산 다툼이 심심찮게 발생해 왔다. ‘돈이 피보다 더 진하다’는 속설이 생길 정도였다. 그런 터에 SK그룹 총수로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최태원 회장이 자신의 경영권을 지탱하는 주식 재산을 흔쾌히 친동생과 사촌형 등 친족들에게 나눠준 것은 세간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SK그룹은 고 최종건 창업주 겸 1대 회장, 고 최종현 2대 회장 형제가 창업과 성장을 이끈 기업이다. 최종건 회장이 선경직물을 창업해 SK그룹의 기초를 다졌다면, 최종현 회장은 섬유 중심의 단출한 사업구조를 가진 SK그룹을 에너지, 화학, 이동통신 등 다각화된 사업을 영위하는 대기업으로 도약시켰다.

1998년 최종현 2대 회장이 타계하면서 재계 안팎의 시선이 SK그룹에 쏠렸다. 과연 누가 SK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결론은 고 최종현 회장의 장남인 현 최태원 회장이었다.

당시 창업주 최종건 회장의 장남인 고 최윤원 씨(전 SK케미칼 회장)를 비롯한 5명의 사촌형제는 가족회의를 통해 최태원 회장을 차기 회장으로 추대했다. 최태원 회장이 외환위기 속에서 SK그룹을 잘 이끌어갈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후 20년 동안 최태원 회장 체제의 SK그룹은 더 큰 도약을 이뤄냈다. 특히 최태원 회장의 결단으로 채권단 관리를 받던 반도체 기업 SK하이닉스를 인수합병(M&A)한 것은 SK그룹의 사업구조를 한층 더 두텁게 다진 ‘신의 한 수’로 회자되고 있다. 최근 최태원 회장은 “지난 20년간 형제 경영진이 지지해주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SK그룹의 성장은 없었을 것”이라며 형제들에게 고마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최태원 SK 회장 ‘깜짝 주식증여’가 남긴 여운

하지만 SK그룹의 꾸준한 성장 기조 속에서도 SK 오너 일가의 ‘계열분리설’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 타계 이후 최씨 가문의 장자가 된 최신원 회장이 SK그룹의 모태기업인 SK네트웍스의 회장으로 부임하고, 그의 동생인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대표이사 부회장이 SK케미칼, SK가스, SK D&D 등을 거느린 중간지주회사 체제를 갖추면서 SK 오너 일가의 계열분리설은 현실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 최태원 회장의 SK㈜ 주식 증여를 계기로 사촌형제간 계열분리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됐다. SK그룹 지주회사인 SK㈜의 지분을 사촌형제와 그 가족들이 골고루 보유하게 됐다는 점에서 SK의 ‘가문(家門)경영’이 더욱 자리를 잡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SK그룹 측도 최태원 회장의 주식 증여로 그룹 지배구조에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SK그룹 형제 경영진 4명이 지난 11월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6차전을 함께 관람하며 우애를 과시했다. 왼쪽부터 최창원 부회장, 최신원 회장, 최태원 회장, 최재원 수석부회장. 연합

지난해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과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최신원 회장의 집무실 한쪽 장식장에는 그와 최태원 회장이 어깨동무를 한 채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액자에 고이 담겨 비치돼 있었다. 그때도 SK 오너 일가의 계열분리설이 꾸준히 나돌던 때였다. 그 사진을 보면서 최신원 회장은 “세간에 우리 형제들이 계열분리를 한다는 둥 어쩐다는 둥 이야기가 많지만 결코 그런 일은 없다”며 “우리 사촌형제 간에 우애와 믿음은 변함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SK그룹이 사촌형제가 함께 경영에 참여하는 체제로 지속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기업 지배구조 측면에서 SK그룹은 한 가지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수펙스(SUPEX)추구협의회’로 불리는 그룹 경영의 최고 협의기구가 바로 그것이다. 수펙스추구협의회는 분야별로 전문화된 위원회를 통해 계열사, 관계사 간의 상호협력을 증진하면서 SK그룹 전체의 경영전략을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전문경영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오너 경영자가 주요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는 다른 재벌그룹과는 차별화된 대목으로 평가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SK그룹은 수펙스추구협의회 등을 통해 전문경영인들이 실질적인 경영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있다”며 “오너 일가는 그룹을 대표하고 전문경영인들이 자율적으로 책임경영을 하는 구조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 관점에서 바람직한 모습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우리나라의 현대적 기업 역사는 사실상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난 1945년 이후에 시작됐다. 역사가 오래된 일부 장수기업을 제외하면 국내 재계의 중추를 이루는 기업 대다수가 광복 이후에 창업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국토가 폐허로 변했지만 오히려 기업가정신이 충만한 인물들에게는 기회의 시대가 열렸다.

이 무렵에 창업한 기업들은 상당수가 ‘가족기업’ 형태로 사업을 성장시켰다. 좋은 인재를 구하기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에 혈연관계로 맺어진 가족을 회사 경영에 참여시킬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있다. 친동생들과 함께 눈부신 성공신화를 일군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구씨 가문과 허씨 가문이 동업 형태로 사업을 번창시킨 LG그룹은 가족기업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힌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형제경영이나 가족경영은 오래되고 익숙한 경영체제라고 할 수 있다. 가족기업은 일반적으로 ‘가족 구성원이 소유와 경영을 동시에 하는 기업’ 또는 ‘가족 구성원은 소유만 하고 전문경영인이 경영을 위임받은 기업’을 말한다.

‘가족경영’은 매우 보편적인 경영 형태

가족기업이라고 하면 언뜻 소규모 기업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기업 규모가 큰 가족기업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일례로 S&P 500(스탠더드&푸어스가 500개의 대형 주식 종목을 대상으로 집계하는 주가지수)에 포함되는 기업이나 미국 경제지 <포춘>이 조사, 발표하는 글로벌 500대 기업의 약 3분의 1이 가족기업으로 분류된다.

과거 대한상공회의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 영국, 스페인, 호주 등 선진국들의 가족기업 비율은 전체 기업의 절반을 웃도는 것은 물론 일부 국가에서는 70%대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 바 있다. 당시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전체 상장기업의 68.3%가 가족기업으로 분류됐다. 비상장기업을 포함하면 국내 기업 중에서 가족기업 비율은 훨씬 더 높아진다는 분석도 있다.

창업과 성장 단계를 거친 가족기업은 창업주가 은퇴하거나 세상을 떠나게 되면 상당수가 ‘분화’ 단계로 이어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창업주의 아들(주로 장자)이 경영권 승계를 하고 나면 그간 경영 참여를 통해 기업 성장에 기여한 가족 구성원들은 일정한 몫을 떼어 계열분리를 하거나 주식 지분을 매각해 자신의 사업체를 따로 만들기도 한다.

일례로 고 정주영 회장이 일군 현대그룹은 그의 타계 이후 아들들이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백화점그룹 등으로 계열분리를 한 바 있다. 아울러 그 전에 정주영 회장의 동생들도 각자 자기 몫의 지분을 챙겨 독자적인 기업을 일구는 길을 선택했다. 한라그룹, KCC그룹, 성우그룹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삼성그룹 역시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별세한 이후 큰 변화를 겪었다. 셋째 아들 이건희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하면서 첫째 아들인 이맹희 씨의 아들이자 장손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을 갖고 계열분리를 단행해 독자적 행보를 선택했다. 이병철 회장의 둘째 아들 이창희 씨는 1970년대에 자기 회사를 차려 독립한 바 있다.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아들만이 아니라 딸들도 일부 계열사를 품에 안고 계열분리를 했다는 점이다. 고 이병철 회장의 장녀 이인희 씨는 한솔제지를 모태로 한솔그룹을 일궜고, 막내딸 이명희 씨는 신세계백화점을 들고 나와 신세계그룹을 재계 순위 10위 안팎의 대기업으로 키워냈다.

사실 국내 대기업 오너 일가 중에서 딸들이 계열분리를 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는 딸에게 회사를 물려주면 오너 일가가 성취한 부(富)가 사위 가문으로 이전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두산그룹은 4세 경영자인 박정원 회장이 그룹 총수 역할을 하고 사촌형제들이 주요 계열사 경영을 맡고 있다. 지난 6월 독일 뮌헨에서 열린 '오토매티카 2018' 행사에 들른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왼쪽). 연합

형제경영과 사촌경영의 모범 사례도 있어

창업주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분화’의 길로 가지 않고 ‘통합’ 상태로 유지되는 가족기업들의 사례도 간혹 찾아볼 수 있다. 국내 재계에서는 ‘최장수 기업’ 두산그룹이 대표적인 예다.

두산그룹은 1896년 설립된 박승직상점이 뿌리다. 박승직 창업주에 이어 본격적인 기업의 틀을 갖춘 것은 그의 아들인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에 이르러서다. 박두병 초대 회장 타계 이후 그의 아들들은 차례대로 두산그룹의 회장직을 수행했다. 이 때문에 국내 재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형제경영’을 펼치는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때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이 ‘형제의 난’을 일으키면서 그간 쌓아 올린 좋은 평판에 금이 간 적도 있었지만, 두산가(家) 3세 형제들은 분열의 위기를 잘 극복하고 가족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016년에는 4세 경영자인 박정원 회장이 두산그룹의 총수로 등극하면서 국내 재계 최초의 ‘4세 경영 시대’를 열어젖힌 바 있다. 아울러 박정원 회장의 사촌형제들이 주요 계열사의 최고경영진으로 포진해 두산가의 가족경영 체제를 유지해나가고 있다.

LG그룹에서 계열분리를 함으로써 독자적인 대기업집단을 형성한 GS그룹과 LS그룹도 형제경영과 가족경영을 무난하게 유지하고 있는 기업으로 꼽힌다.

GS그룹은 고 허만정 LG그룹 공동 창업주의 3세들이 공동으로 경영하는 지배구조를 이루고 있다. 허만정 창업주의 둘째 아들인 고 허준구 전 LG건설 명예회장 일가의 지분율이 가장 높다. 또 고 허준구 명예회장의 장남인 허창수 GS그룹 회장이 2005년 그룹 출범 때부터 초대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GS그룹은 현재 허창수 회장을 비롯한 3세 경영자들이 주요 계열사의 회장이나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4세 경영자들이 점차 경영일선으로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오너 3, 4세들이 GS그룹 지주회사인 ㈜GS의 지분을 조금씩 골고루 보유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GS그룹은 3세 사촌형제들끼리 재산을 분할한 상태에서 GS라는 공동의 터전에서 기업을 경영해나가는 구조로 볼 수 있다”며 “GS그룹의 경우에는 회장 직책도 다른 재벌 총수처럼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그룹의 대표자 역할 정도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GS그룹은 허창수 회장을 비롯해 오너 일가 3, 4세 경영진이 함께 이끌고 있다. 허창수 GS 회장이 임원 모임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

‘오너 리스크’ 피하려면 ‘소유와 경영 분리’가 바람직

LS그룹은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셋째, 넷째, 다섯째 동생(구태회, 구평회, 구두회) 가문이 일종의 사업 파트너십 형태를 지향하며 하나의 대기업집단을 형성한 경우다. 구태회 전 LS전선 명예회장의 장남인 구자홍 LS니꼬동제련 회장이 초대 그룹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구평회 전 E1 명예회장의 장남인 구자열 LS그룹 회장이 그룹을 이끌고 있다. LS그룹 오너 일가는 가족회의를 통해 주요 경영 현안을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졌을 정도로 가족경영 체제가 잘 자리매김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막대한 부를 축적한 대기업의 오너 일가가 사이 좋게 형제경영이나 사촌경영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인간의 욕심은 본질적으로 돈과 권력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기 때문이다. 국내 재계에서 ‘왕자의 난’이나 ‘형제의 난’이 잊을 만하면 다시 일어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가 말한다. “일부 대기업들이 롤모델로 여기는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은 기업을 소유하지만 경영은 전문경영인들에게 위임한다. 형제나 가족이 경영을 하게 되면 불협화음이 일어날 소지가 있고 ‘오너 리스크’의 위험성도 있다. 이제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김윤현 기자 unyon21@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