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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 회장, 대한항공 이사 연임안 부결

조 회장, 20년 만에 물러나… 경영차질 우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70)이 한진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의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하면서 20년 만에 대한항공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재벌 총수가 주총 표결을 통해 주주들에게 퇴출되기는 처음이며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책임 원칙)에 따라 기업 총수가 물러난 첫 사례이다.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적극 주문하는 ‘주주행동주의’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재계의 긴장감은 커질 전망이다.

대한항공은 27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제57기 정기주주총회를 열고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 등 4개 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의결권이 있는 주식의 73.84%가 참여한 이날 표결에서 조 회장 사내이사 연임안은 찬성 64.09%를 얻어 ‘참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66.6%)을 받아야 하는 정관 규정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에 따라 조 회장은 1999년 부친인 고(故) 조중훈 회장에 이어 대표이사 최고경영자에 오른 지 20년 만에 자리에서 내려오게 됐다. 조 회장은 1992년 대한항공 사내이사에 등재됐고 1999년 대표이사에 올랐다.

일반적으로 상장사의 이사 선임은 주총 출석 주주 과반의 찬성만 얻으면 된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이사 선임을 출석 주주 3분의 2 찬성이라는 특별결의 요건으로 정해 놓은 탓에 64.1%라는 찬성표를 얻고도 연임에 실패했다. 외환위기 당시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방지하기 위해 사내이사 선임 요건을 강화한 정관이 발목을 잡은 셈이다.

발톱 드러낸 종이호랑이 ‘국민연금’

그동안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 국내주식 108조9000억원치를 갖고 있으면서도 주주로서 존재감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경영진의 안건에 대부분 찬성표로 일관해 비판을 받았고, 간혹 반대표를 행사하더라도 판세를 바꾸는 데는 실패해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들었다. 실제로 국민연금이 공시한 올해 의결권 행사 내용에 따르면 26일까지 109개 기업의 주총 안건 중 122개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했으나 15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원안대로 통과됐다.

하지만 이번에 국민연금 주도로 대기업 총수의 이사직을 박탈하는 첫 사례가 나옴에 따라 앞으로는 국민연금의 영향력에 힘이 크게 실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을 발표한 뒤 본격적인 주주권 강화에 나서면서 ‘저배당 기업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등 기업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가 연금의 주인인 국민 등의 이익을 위해 주주 활동에 책임성을 부여하는 원칙으로,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이다.

해외 연기금 사이에서는 스튜어드십 코드와 사회책임투자가 이미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고 있다.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캘퍼스)은 포커스리스트 프로그램을 활용해 매년 지배구조 등에 문제가 심각한 기업의 명단과 지적사항 등 개선 사항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일본 공적연금(GPIF)은 2014년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고 유엔 책임투자원칙(UN PRI)에 서명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조 회장의 대한항공 이사 연임에 반대하고 이것이 실제로 주총에서 현실화된 것은 국민연금 주주권 강화의 정점을 찍는 사례로 평가된다.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출석 주주들은 조 회장 연임 찬반 투표에서 찬성은 64.1%, 반대는 35.9%를 기록했다. 대한항공 지분은 조 회장과 한진그룹 지주회사 격인 한진칼 등 특수관계인이 33.35%를 보유하고 있다. 이어 국민연금 11.7%, 외국인 지분 24.76%, 기타 주주 30.19% 등으로 구성된다. 반대표를 던진 국민연금 지분에 외국인 지분을 더하면 36.46%로 이날 투표에서 반대표와 비슷하다. 국민연금이 이날 찬성표를 던졌다면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은 부결되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한다.

주주총회 하루 전인 지난 26일 국민연금은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열고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했다. 국민연금은 “사내이사 조양호 선임의 건에 대해 기업가치 훼손 또는 주주권 침해의 이력이 있다고 판단해 반대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런 결정에 앞서 세계 5대 연기금의 하나인 캐나다공적연기금(CPPIB)과 미국 플로리다연금,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투자공사도 조 회장 연임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대한항공 지분을 소유한 해외 기관들이 반대표로 돌아선 것이다.

이밖에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인 ISS와 국내 서스틴베스트·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도 대한항공 주주들에게 반대표 행사를 권고했다. 이들의 의견은 외국인과 기관투자가들이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 데 가이드라인이 된다.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 방향을 미리 공개하고 외국인과 기관, 소액주주가 여기에 가세하는 모양새를 보였다는 점도 주총의 새로운 모습이다. 대한항공의 경우처럼 오너 일가가 연이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기업은 주주들이 자발적으로 결집해 최고경영자를 끌어내릴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한 셈이다.

대한항공, 브랜드 이미지 훼손·경영악화 우려

대한항공 내부에서는 20년간 그룹을 이끌어온 조 회장의 갑작스러운 퇴출로 브랜드 이미지 훼손과 함께 경영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하고 있다. 당장 오는 6월 대한항공 주관으로 서울에서 처음 개최되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연차총회가 문제다. IATA는 전 세계 120개국 287개 민간 항공사가 회원으로 있는 국제 항공 협력 기구로 총회 의장은 주관 항공사 CEO가 맡는 것이 관례다. 사내이사가 유지됐다면 조 회장이 의장을 맡아야 하는데, 퇴출된 상황이라 대안 마련을 고심해야 할 상황이다.

지난해 환율 등 경영 여건 악화로 영업이익이 크게 줄어든 대한항공은 올해부터 대대적인 중장기 비전을 실행해 2023년 영업이익 1조7000억원, 부채비율 395%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델타항공과의 조인트벤처 출범으로 상호 협력을 시작하면서 올해 턴어라운드를 본격화하고 있는 와중에 조 회장이 퇴출되면서 계획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한항공은 조 회장, 장남 조원태 사장, 우기홍 부사장 등 3인 각자대표체제였다. 앞으로는 2인 대표이사 체제로 운영될 전망이다. 실제로는 조 사장을 중심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조 사장이 사내 대표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고, 대한항공 최대주주인 한진칼과 (주)한진 사내이사도 유지할 것으로 보여 조 회장이 대한항공 경영에서 완전히 배제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 회장직은 유지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이를 반영하듯 대한항공 관계자는 “조 회장의 사내이사직의 상실이며 경영권 박탈은 아니다”라고 설명하며 “(주총 결정으로) 미등기 회장으로 경영은 계속하며 경영권은 유지하되, 대표이사직만 상실되는 게 맞다”고 덧붙였다. 그룹 지주사인 한진칼 대표이사와 대한항공 회장으로서 사업에 차질이 없도록 그룹 경영을 이어나가겠다는 것이다.

한편 조 회장은 지난해 말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현재까지 로스앤젤레스 별장에 칩거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 회장은 현지에서 주총과 관련된 사안을 보고받으며 향후 대책에 대해 대한항공 임직원과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 사내이사에서 물러난 데 이어 검찰 추가 수사도 앞두고 있다. 조 회장은 현재 대한항공 납품업체로부터 기내 면세품을 총수 일가가 지배한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중개수수료 196억원을 받은 혐의(특경법상 배임)로 기소되는 등 270억 규모의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또, 2014년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에 이어 지난해 차녀 조현민 전 진에어 부사장의 ‘물컵 갑질’ 등 일가의 비리 혐의가 폭로되며 여론이 크게 악화됐다.
“여론 휩쓸린 결정” “연금사회주의 현실화” 우려 증폭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 방향을 미리 공개하고 외국인과 기관, 소액주주가 여기에 가세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연임 의지를 꺾으면서 재계에서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조 회장의 경영권 박탈은 국민연금이 주요 주총 안건에 대해 작년까지 사후공시를 해오던 것을 올해부터 ‘사전공시’로 바꾼 것이 결정적이라는 분석이다. 국민연금은 올해부터 지분 10% 이상 보유 기업과 국내 주식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 이상인 기업에 대해 의결권 찬반을 사전에 공개하면서 국민연금 지분이 상대적으로 높거나 오너 일가 지분이 낮은 상장사의 경우 국민연금이 기관투자가와 소액주주들의 여론을 모아 표 대결을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올해 초를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기업은 293곳으로, 이 중 지분이 10%를 넘는 기업도 80곳에 달한다.

대한항공 주총 결과에 대해 정부와 정치권은 긍정적이다. 경영진의 사익추구와 횡령, 배임 등으로 기업 가치를 훼손해 국민의 노후자금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를 막는다는 차원에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27일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회의에서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가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후 이행하는 긍정적인 면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형석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연구원은 “기업지배구조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경우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기업 가치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고 말했다. 또“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견해가 혼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 참여자들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국민연금의 주주활동을 통해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이에 따른 기업 가치 향상을 기대하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덧붙였다.

반면 국민연금의 상장사 경영 압박에 대해 재계에서는 ‘연금사회주의’를 언급하며 불만이 나오고 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간섭하는 ‘연금 사회주의’가 현실화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지난달 국민연금이 남양유업의 배당을 확대하라고 요구했는데 실제로 배당을 확대하면 오너 일가가 더 혜택을 보거나, 주식시장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외국인 주주들이 혜택을 본다”며 국민연금이 이치에 맞지 않는 요구를 한다고 설명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도 유감을 표명하는 입장문을 냈다. “주주들의 이익과 주주가치를 고려해 신중한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논란을 이유로 연임 반대 결정을 내린 데 대해 우려스럽게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특히 기업의 경영권에 대한 평가는 부분적, 일시적 사정을 넘어 장기간의 경영성과와 총체적인 관리능력 등에 대해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하지만 국민연금이 조양호 회장 건을 심의한 과정을 보면 심도 있는 논의 없이 여론에 휩쓸려 결정됐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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