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때마다 빛난 '뚝심의 승부사'…"당국의 전방위 압박 스트레스 됐을 듯"

국내 대표 1, 2위 대형항공사(FSC·Full Service Carrier)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오너 문제라는 난기류를 만났다. 한진그룹은 지난 8일 조양호 회장의 급서로 대한항공의 지배력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고,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박삼구 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나는 결단을 내렸지만 금융당국으로터 오케이 사인을 받지 못한 상황이다.
지난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한 뒤 선대에 이어 45년간 ‘수송보국(輸送報國)’을 실천해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지난 8일 별세했다. 향년 70세.

대한항공은 조 회장이 이날 0시16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숙환인 폐질환으로 타계했다고 밝혔다. 한진그룹 관계자는 “조 회장이 미국에서 수술 받은 뒤 상태가 좋아졌다가 최근 대한항공 주주총회 이후 대표이사직 상실에 따른 스트레스 등으로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조 회장, ‘오너 리스크’로 스트레스

조 회장은 지난달 27일 대한항공 주총에서 국민연금의 반대로 대표이사 재선임에 실패하며 20년 동안 맡아온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책임 원칙)’가 지난해 7월 도입된 뒤 대기업 총수가 물러난 첫 사례다. 재계에서는 2014년 조현아 전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과 지난해 조현민 전 전무의 ‘물컵 갑질’ 사태가 연이어 터지고, 조 회장의 부인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이 운전기사와 가정부 등에게 폭언을 일삼았다는 논란마저 불거졌다. 대한항공의 ‘오너리스크’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고, 한진그룹에 대한 검경은 물론 국세청·관세청·공정거래위원회 등 사정당국의 전방위 수사가 진행되면서 조 회장의 스트레스가 컸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최근 1년 동안 대한항공 등 한진 계열사는 총 18회의 압수수색을 받았으며 그간 조 회장과 이 전 이사장, 조 전 부사장, 조 전 전무 등이 포토라인에 선 횟수도 열 차례를 훌쩍 넘는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사정당국이 단일 기업을 대상으로 일사불란하게 조사 및 수사에 나선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대한항공은 글로벌 경기침체 돌파를 위한 경영전략 마련이 시급한 가운데 조 회장의 부재로 충격에 빠진 모습이다. 한진그룹과 주력 계열사인 대한항공은 이날부터 비상경영 체제에 들어갔다.

조 회장, 위기 때마다 빛 발한 뚝심

조 회장은 한국 항공산업이 전 세계의 하늘을 누릴 수 있게 만든 경영인이다. 조 회장은 1949년 3월 8일 인천에서 한진그룹 창업주인 고 조중훈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9년 조중훈 회장은 적자를 보던 대한한공공사를 인수했는데, 구형 프로펠러기 7대와 제트기 1대를 가지고 36억원의 매출에다 취항도시도 일본 3개 노선에 불과한 회사였다. 조 회장은 1974년 미주지역본부 과장으로 입사해 영업과 정비·자재·정보기술(IT) 등을 거쳐 1992년 대한항공 대표이사 사장, 1999년 대한항공 회장에 올랐다. 조 회장이 입사하자마자 닥친 두 차례의 오일쇼크(1973·1978년)는 전 세계 경제 지도를 바꿔놓았다. 당시 조 회장은 조중훈 회장이 보잉747 점보기를 도입해 많은 승객을 태우며 연료비 인상을 극복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초년생의 경험은 조 회장을 위기의 파고를 헤치는 승부사로 만들었다.

단련된 위기대응 능력은 1997년 외환위기 때 빛을 발했다. 항공기를 임차하기보다 보유하는 전략을 썼던 대한항공은 위기 때 보유 항공기를 매각한 후 재임차하는 방법으로 유동성 위기에 대처했다. 조 회장은 1998년 대형항공기 27대의 구매계약을 체결했다. 이어 건실한 경영을 바탕으로 조 회장은 미국 델타항공에 항공사 노선을 공유하는 동맹체(얼라이언스)를 제안했다. 에어프랑스와 아에로멕시코 등에도 같은 제안을 했고 2000년 6월 뉴욕에서 대한항공이 주도적으로 만든 ‘스카이팀’을 창설하며 글로벌 항공사로 올라섰다. 현재 스카이팀은 175개국, 1150여개 도시에 매일 1만4500편의 항공기를 운항하고 있다.

2000년대에 초대형항공기인 A380 기종을 도입한 것도 이 같은 그의 경륜에서 나왔다. 스카이팀 창설과 글로벌 노선 확장으로 2000년대 대한항공은 승승장구했다. 정부는 조 회장이 2005년 대한항공을 국제화물운송 부문 세계 1위 기업으로 만든 공로를 인정해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발인은 4월 16일 오전 6시이며, 장지는 경기도 용인시 하갈동 신갈 선영이다.

조원태 사장, 경영 승계 가속화할 듯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8일 별세하면서 한진그룹 3세 경영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 회장의 3남매 중 장남이자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조원태 사장의 승계 가능성이 가장 높게 전망되고 있다. 다만, 상속세 부담으로 지배구조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고, 조 회장 일가의 지배력 유지를 위해 지주회사 한진칼의 배당성향이 급격히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그룹 승계는 조 회장이 보유한 한진칼 지분을 3남매가 어떤 비율로 상속받는 지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한진그룹 지배구조는 지주회사인 한진칼을 중심으로 한진칼→대한항공→손자회사로 이어진다. 한진칼은 대한항공 최대주주이면서 진에어(60%), 칼호텔네트워크(100%)를 소유하고 있다. 한진칼 지분 상속이 곧 한진그룹의 경영권을 승계 받는 구조인 셈이다. 현재 조 회장 일가가 보유한 한진칼 지분은 29.93%다. 조 회장이 17.84%를, 조원태·현아·현민씨는 2.34%, 2.31%, 2.30%를 보유하고 있다.

조원태 사장은 현재 조 회장의 자녀 중 유일하게 경영에 참여하고 있어 그룹 승계 가능성이 가장 높게 점쳐진다. 조 사장은 2003년 8월 한진정보통신 영업기획 차장으로 그룹에 합류해 대한항공 경영기획팀 부팀장, 여객사업본부 본부장(상무), 경영전략본부장(전무), 화물사업본부장(부사장), 총괄부사장 등을 거쳐 2017년 1월 대한항공 사장에 올랐다. 이듬해 3월 대한항공 사내이사로 선임된 조 사장은 조양호 회장이 지난 3월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하면서 사주 일가 중 유일하게 대한항공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앞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는 ‘땅콩 회항’, ‘물컵 갑질’ 등의 논란으로 그룹 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다만 조 사장이 본격적인 경영능력을 발휘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향후 중대한 시험대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조 사장이 대표이사로 재임 중인 2년간 대한항공은 흑자 전환에 성공하며 미국 델타항공과의 조인트 벤처 등으로 수익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를 조 사장만의 능력이라고 보기엔 어렵다는 지적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3월 조양호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 실패 이후 “조원태 사장의 경영능력에 대한 의구심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최고경영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총수일가가 경쟁 없이 최고경영자(CEO)로 선임될 경우 그룹을 위기로 내몰 수 있다”고 했다.

그룹의 승계가 순조롭게 이뤄지기 위해선 상속세가 넘어야 할 장애물이다. 조 회장의 지분을 자녀들이 넘겨받을 때 내야 할 상속세 규모는 2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양지환 대신증권 연구원은 “조 회장 타계로 지분 상속 등을 통한 후계 승계 작업이 본격화될 전망이고 당분간 조원태 대표이사에게 경영권이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며 “경영권에 영향을 주는 한진칼 지분 외에 정석기업 등 지분을 매각하고, 대구·부산의 부동산 등 자산을 매각하면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재계와 금융투자업계 일각에서는 한진그룹이 상속세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고(故) 조 회장의 막내 동생인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회장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조 회장이 행동주의펀드 KCGI와 손잡고 한진그룹 경영권 장악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KCGI는 한진칼 지분 13.47%를 보유한 2대 주주다.

이종혜 기자



이종혜 기자 hey33@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