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에 거래제한 조치를 취하는 등 중국에 대한 전방위 압박에 나섰다. 미국이 우리 정부에 화웨이 거래제한 동참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이번에는 중국이 글로벌 정보기술(IT)기업들을 불러 미국에 협조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경고를 받은 기업 가운데 삼성과 SK하이닉스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기업들이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9일 미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에 따르면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와 상무부·공업정보화기술부는 지난 4~5일 주요 IT기업들을 불러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對中) 거래금지 조치에 협조하면 “심각한 결과(dire consequences)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NYT는 “중국이 부른 기업에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와 델, 영국 ARM 등과 함께 한국의 삼성과 SK하이닉스도 포함됐다”고 전했다. 앞서 미국도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앞세워 ‘반(反)화웨이’ 전선 합류를 촉구한 바 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발개위·NDRC)는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기술안전관리 리스트’ 제도를 조만간 도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업체, 연간 화웨이 납품액 12조 삼성·SK·LG 등 국내 기업들도 노심초사하고 있다. 화웨이와 거래하는 이들 기업은 지난달 ‘미국 정부의 거래중단 요청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중국의 협조 요청까지 더해지면서 상황은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업체의 연간 화웨이 납품액은 106억5000만달러(약 12조6000억원)에 달한다. 반도체뿐만 아니라 화웨이에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을 공급하는 삼성디스플레이, 스마트폰용 카메라 모듈을 생산하는 삼성전기·LG이노텍 등 부품사의 공급량 감소도 우려된다. 특히 국내 이동통신사 가운데 유일하게 화웨이 4G, 5G(5세대 이동통신) 장비를 사용 중인 LG유플러스는 미국 주도의 반(反)화웨이 정책에 좌불안석이다. LG유플러스의 4G 기지국은 3분의 1 이상이 화웨이 장비이고, 수도권의 경우 현재까지 구축된 5G 기지국 중 90%가 화웨이 장비인 것으로 알려졌다. 망과 망을 연결하는 전송망 부분은 이동통신 3사가 모두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화웨이 장비 설치를 계획대로 추진한다는 방침이지만, 업계에서는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전략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통신사들은 화웨이가 적용된 전송장비는 데이터를 전송하기 위한 장치로 정보가 머무르거나 경로를 지정하는 기능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해킹되거나 정보 유출이 될 일이 없다고 강조한다. 미국이 안보를 이유로 화웨이 배제를 요청했더라도, 화웨이 제품이 적용된 장비를 보면 보안과 큰 관계가 없다는 설명이다. 또한 군사 정보 유출 위험에 대해서는 5G 기지국 등의 무선 장비와 상용 기간망은 군에서 쓰는 군사안보 통신망과 분리해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화웨이 장비 도입으로 인한 군 정보 유출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메모리 업체인 SK하이닉스의 경우 화웨이에 공급하는 메모리 매출이 분기당 약 1조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에서 화웨이의 비중이 5% 수준이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통신장비 등 화웨이 제재의 반사이익도 일부 누릴 수 있다.

지난해 말부터 하락한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회복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반도체 시장조사 업체 D램 익스체인지는 올 하반기 D램 가격이 25% 이상 추락할 것이라 내다보고 있다. 이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토요일인 지난 1일 사장단 회의를 열고 비상경영에 나선 상황이다.

삼성·LG·SK하이닉스 등 중국 생산법인, ‘제재 우려’

뿐만 아니라 국내 기업은 중국 현지 생산법인은 30~40곳에 달한다. 중국 현지 업체와 합작 형태로 국내에서 투자한 자금이 수십조원 규모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낸드플래시, SK하이닉스는 우시에서 D램을 생산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부터 7조9000억원을 들여 시안 낸드플래시 2공장을 짓고 있다. SK하이닉스는 9500억원을 투자해 지난 4월 증설한 우시 공장에서 전체 D램 생산량의 절반을 만든다.

LG전자는 난징·타이저우·친황다오·칭다오 등 중국 8개 지역에서 가전, 휴대폰, 자동차 전장 텔레매틱스 생산라인을 가동 중이다. LG디스플레이가 2017년부터 5조원을 투자한 광저우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 생산라인은 올 하반기부터 양산을 시작한다. LG화학은 13일 중국 지리자동차와 합작법인 계약을 체결했다. 공장 위치와 법인 명칭은 추후에 확정할 예정이고 연말에 착공한다. 2021년까지 전기차 배터리 10기가와트시(GWh) 생산 능력을 갖춰 2022년부터 지리자동차와 자회사가 중국에 출시하는 전기차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SK이노베이션은 중국 최대 완성차업체인 베이징자동차와 합작, 8200억원을 들여 창저우에 배터리 셀 공장을 짓고 있다. 4000억원을 투자한 배터리 소재 생산 공장도 착공했다.

문제는 중국 현지공장에 대한 제재가 현실화되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때 상황과 유사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2017년 3월 롯데마트 중국 매장 99곳 가운데 87곳이 영업정지를 당한 뒤 지난해 중국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당시 중국 정부는 소방법·위생법 등을 동원해 롯데마트에 장기간 영업정지를 내렸다. 롯데제과가 미국 허쉬와 합작해 운영하던 상하이 생산공장도 이때 생산정지 조치를 받았다. 현대경제연구원은 2017년 3월부터 1년 동안 사드 사태로 인해 국내 기업이 입은 직·간접 피해를 8조5000억원으로 추산했다. 사드 부지를 제공했던 롯데그룹이 1년 동안 입은 피해 규모만 2조원에 달한다는 집계가 있다.

반도체 라인의 청결도나 화학물질 발생 등을 이유로 중국 당국이 제재를 내린다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방법이 없다. 소방·안전점검 외에 세무감사, 공해물질 배출 조사, 통관 지연 등 중국 당국이 동원할 방법은 많다. 이에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은 예상되는 피해나 대응책 등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미중 무역분쟁이 장기화되면서 경제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또한 미중 무역분쟁이 타협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으면서 상장사 실적 부진 역시 장기화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조승빈 대신증권 연구원은 “미중 무역협상이 잘 진행됐으면 수출 개선과 기업실적 회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왔겠으나 무역분쟁이 악화되면서 기업 실적 불확실성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중국 업계 관계자는 “중국 당국은 마음만 먹으면 한국 기업의 목을 여러 각도에서 죌 수 있다"며 “중국 내부에서는 국유기업과 민영기업의 협력을 늘리고 의료, 교육 산업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는데 이번 미중 무역 전쟁을 시작으로 그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며 “한국 기업들이 LG의 행보처럼 정치적 이슈에 매몰되지 않고 기업의 이득에 따라 움직인다면 사드 문제까지 함께 해결될 가능성도 높다”고 말했다.

정부도 난감한 상황이다. 일단 정부 기본 입장은 ‘전략적 모호성’으로 보인다.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이 브리핑에서 화웨이와의 거래 여부는 정부의 정책적 결정사항이라기보다는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안이라는 뜻을 내비쳤다. 모호성을 띈 이유는 화웨이를 둘러싼 미중 갈등의 양상이 사드 때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 때는 안보 이슈를 중국이 경제 문제와 결부시켜 보복했다. 미국 정부가 동참을 직접 압박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화웨이와 거래 여부는 시장 논리대로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기업이 결정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견해가 많다.

곽노성 동국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사드 때는 정부가 중국의 압박을 최대한 흘려 넘겼다면, 이번에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며 “큰 틀에서는 미국의 입장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고 판단해야 하지만, 화웨이와 관련해 얘기하고 있는 국가안보 위협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 반 화웨이 전선에 동참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하면서 중국도 달래는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종혜 기자



이종혜 기자 hey33@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