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를 내치에 이용하려는 아베의 꼼수…한국 '희생양' 삼아 동북아 질서 재편

일본은 줄곧 대(對)한국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해 왔다. 그런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수출제재에 나섰다. 일본의 행보가 의구심을 낳는 이유다. 물론 동아시아의 정치·경제 등 대외적 변수도 있지만 일각에선 일본의 진짜 속셈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외교 전문가들의 ‘일본의 속내’에 대한 분석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명확한 한 가지가 있다. 일본의 노림수가 단일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속사정을 짚어봤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참의원 선거 하루 뒤인 22일 도쿄 자민당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동북아 질서 재편

1945년 8월15일 광복 이래 한일 관계는 역사 문제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곧잘 버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국을 구심점 삼아 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견제하는 ‘반공전선’을 구축하는 데에 한일 간 우호적 관계는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특히 중요했다. 세계 어느 지역보다 탈냉전 속도가 더딘 곳의 중심에 한반도가 자리해서다. 공산주의를 이끄는 소련과 중국이 인접했고, 현재까지도 무력 도발을 자행 중인 북한이 위치한 탓에 한국과 일본은 힘을 모아야만 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 과거와 비교하면 동북아에도 ‘평화’라 할 만한 시대가 됐다. 한국은 급성장했고, 중국은 G2국가로 불린다. 일본은 다른 면에서 예전과 다르다. 탈냉전 이후 평균 10%를 상회한 경제성장률이 1990년대 들어 급격히 꺾였다. 이제는 중성장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중국은 올라섰고, 한국은 추격하는 상황. 일본은 위협을 느낀 걸까. 그래서 이런 판도를 뒤바꾸려는 것일까. 지금 일본의 무역보복의 조치 의도가 여기에 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동북아의 정치·경제·문화 대국을 자처해온 일본이 ‘새판 짜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면우 세종연구소 부소장은 “탈냉전 이후 수십 년 간 세계가 변화하며 일본 내부에서는 정치와 경제 등의 ‘대국화’에 대한 요구가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며 “주로 전후 세대로서 영광을 맛본 현재 일본 정치권 인사들은 과거의 위상을 되찾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세계정세 재편을 위한 포석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냉전 체제 붕괴 후 이어져 온 ‘미국 1강’ 구도가 불안해진 지금, 일본이 존재감을 드러내려 한다는 뜻이다. 우익세력이 다수를 점한 일본 정치권 내에서 이에 대한 요구는 10여 년 전부터 제기돼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소장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세계정세가 불투명해지면서, 일본 내부에서는 자국의 역할을 주창하는 목소리가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다”며 “그 과정에서 안보 및 경제와 관련한 한국과의 관계 재정립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한반도 길들이기

동북아와 국제사회 등 큰 그림 보다는 단순 ‘한국 길들이기’로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판결 등 일본의 심기를 건드린 데 대한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 같은 분석의 핵심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속셈이란 데에 있다. 특히 한국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인 남북관계 개선을 방해, 이를 통해 “일본을 배제하고는 관련 문제를 풀 수 없을 것”이란 뜻을 내비친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실제로 이번 정부 들어 진행된 북한 비핵화 협상에서는 늘 ‘재팬 패싱’ 논란이 일었다. 해당 사안을 논의할 때 일본의 목소리가 반영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버젓이 북한을 마주하고 있는 데다, 한미일 동맹의 한 축이면서도 정작 논의 시에는 항상 자리 밖에 있었던 셈이다.

이번에 일본이 한국에 수출한 전략물자를 두고 북한 유출 의혹을 제기한 대목은 이런 주장에 힘을 싣는다. 일본이 의혹의 입증책임을 지고도 이처럼 허황된 주장을 하는 것은 즉, 북한이 경제보복의 주요 배경 중 하나란 것이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일본이 기술패권을 내세워 남북관계 등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필한 것”이라며 “특히 북미 간 실무회담이 앞으로도 전개될 것으로 보이는 상황을 염두에 둔 듯하다”고 말했다.

조금 더 구체적인 근거도 제시됐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일본의 정치인과 학자 등 지식인 집단인 ‘후지산 모임’의 전략보고서를 거론했다. 이에 따르면 일본은 불완전한 한미일 공조체제 하에서는 남북관계 개선을 이룰 수 없다고 본다.

남 교수는 “소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서 일본이 자국의 존재를 각인시키려는 목적이 있을 것”이라며 “일본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거치지 않고는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관광 재개 등을 비롯한 남북협력이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신호를 보내고 싶을 것”이라고 봤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회원들이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한일 갈등 조장 아베 정권 규탄 공동 기자회견'에서 과거사 사과 및 경제 보복 중단 촉구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국 ‘희생양’ 삼아, 일본 내부결속 다져

강제 징용 배상 판결로 촉발된 한일 과거사 갈등이 ‘한국 때리기’의 빌미로 활용되는 등 아베 총리에게 정치적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아베 정권이 일본 내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극우세력과 지지층을 결집해 헌법 개정의 동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최근 한일 갈등이 긴요하게 쓰이는 듯하다.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로 잘 알려진 아베에게 한반도는 정치적 도약의 발판이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총리가 되면서 그는 관방 부장관에 발탁됐다. 이듬해 평양에서 북일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일본인 납치 문제를 내세워 대북 강경책을 주도했다. 그 덕분에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자민당 간사장까지 올랐다. 그리고 2006년 52세에 총리 자리를 거머쥐었다. 선거의 단골 캐치프레이즈인 ‘북한 때리기’가 북·미 화해로 약발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한국 때리기’를 꺼낸 것이다. 이미 그는 2012년 12월 집권 이후 일본 국내 극우 정서에 편승하고 정치적 기반을 넓히기 위해 위안부 문제를 활용해 왔다. 2014년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의 내용을 부정하는 등 일본 내 극우파들의 반한 감정을 자극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강제노역에 동원된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판결됐다. 또 ‘일본 전범 기업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손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즉각 반발했고 일본 기업 역시 배상을 거부했다. 또 일본은 초계기를 저공비행시키면서 군사적 긴장 상태를 조성했다.

전문가들 사이에 이번 강제 징용 문제가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도 아베의 면면에 있다. 아베는 1993년 부친 아베 신타로 외상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처음 당선된 때의 국회 등원 소감부터 남달랐다. 그는 “헌법 개정을 하기 위해 의원이 됐다. 한시라도 빨리 미국에 의해 강요된 헌법이 아닌 일본의 자주헌법을 제정하고 싶다”고 했다. 아베는 개헌의 야심을 위해 또, 임기 후반기로 갈수록 약화되는 구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한·일 갈등을 오래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 곽노성 동국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외교를 내치에 이용하는 아베 정권 꼼수를 쓴 셈이다.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전체 245석 중 9석 감소한 113석을 차지했다. 이는 한국에 대한 압박이 먹히지 않았다는 것은 방증한다”며 “큰 동력은 일부 상실된 듯하고 내부 결속을 위한 정치 이슈로 계속 끌고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자국 기업, 자산 보호를 위한 명분으로 내부 결속을 할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자국 기업의 자산이 당장 압류 조치 당하고 있고 현금화가 돼서 피해자들에게 배상 지불까지 하게 되면, 일본 정부와 금융권이 자국 기업에 대한 자산 보호조치 차원에서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강제징용 대법 판결에 대한 불만

‘안보와 관련한 부적절한 수출관리가 있었다’는 게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줄곧 밝혀 온 대(對)한국 수출규제 조치의 핵심 이유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본 기업이 패소한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뒤 대책 마련에 적극 나서지 않는 한국 측에 보복하기 위한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외교부 일본 담당 과장을 지낸 유의상 ‘식민과냉전연구회’ 이사는 지난 18일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포럼에서 “수출규제는 일본의 화풀이이자 힘 과시”라며 “어렵게 도출된 ‘위안부 합의’가 사실상 형해화한 데 이어, 청구권협정 체결 이후 별 탈 없던 강제동원 관련 합의를 뒤집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는데도 한국 정부가 아무 대책을 내놓지 않자 아베 총리가 화가 났다는 게 일본 고위 외교관의 전언”이라며 이같이 설명했다. 최희식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확대 해석을 자제해야 한다”며 “수출규제는 단지, 일본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한국정부가 일본이 원하는 답 안에 근접하게 하려고 압박하는 것” 이라며 “일본은 이중심리가 있어, 헌법 개정을 찬성하면서도, 헌법 구조에 대해선 지켰으면 하고 평화국가의 틀을 깨는 것은 아직도 50%이상이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종혜 기자 주현웅 기자



이종혜 기자 hey33@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