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원유 가격이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로 떨어진 가운데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딜링룸에서 직원이 업무를 보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하락 압력이 이어지는 가운데 원유시장의 ‘선물 만기 이벤트’가 겹치면서 기록적인 낙폭을 보였다. 연합

코스피가 1900을 넘었다. 반면 유가는 급등락을 거듭하는 등 불안정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가를 끌어올린 동력은 낮은 주가였다. 저점부터 따지면 주가가 35%나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은 주가가 여전히 낮다고 생각하고 있다. 미국 주식시장이 꾸준히 상승 시도를 하고 있는 점도 안도감을 줬다. 문제는 주가다. 고점대비 하락 폭이 15%로 줄었다. 15%는 경기 둔화가 아닌 일반 상황에서도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수치다. 더 이상 주가가 낮다는 사실만으로 시장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시장이 또 다른 국면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할 때가 됐다. 외국인이 주식을 계속 내다 팔았다. 매도 규모가 줄어 수급이 안정을 찾기는 했지만 주가도 많이 올라 외국인 매매 변화가 주가를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개인투자자들의 힘이 강해지는 상태여서 당분간 그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유가 하락으로 시장의 변동이 커져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이 장중 한때 -37.6달러까지 떨어졌다. 전례없는 일이어서 언론에서 석유를 돈을 주고 파는 일이 벌어졌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지금 원유시장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보여준다. 앞으로 유가가 어떻게 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하루에 30% 가까이 가격이 오르고 내릴 정도로 변동성이 큰 상태여서 전망을 하는 게 의미가 없기도 하다. 그래도 예상해 본다면 20~30달러대에서 오랜 시간 횡보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원자재는 주식과 달리 실제 수요와 공급이 존재하는 부문이다. 그래서 과거 가격 움직임을 보면 한번 수급이 맞을 경우 가격 균형이 깨질 때까지 오랜 시간 가격이 유지되는 속성을 보였다. 1984년부터 1999년까지 유가가 10달러대를 벗어나지 않았던 게 대표적인 예였다. 지금도 사정이 비슷하다. 연초부터 새로운 균형점을 향해 유가가 떨어졌는데 20~30달러 사이가 균형점이 아닐까 싶다. 유가가 떨어지면 기업들은 제품 생산이나 공장 가동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그 영향으로 기업 자금 사정이 개선되고 투자를 늘어 경기가 좋아지게 된다. 우리나라처럼 석유를 100% 수입에 의존하는 경우는 그 효과가 더 커진다. 문제는 지금처럼 유가가 조금씩 낮아지는 게 아니라 급락하는 경우다. 유가 하락이 실물경제의 극심한 침체를 반영한 결과로 여겨져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 유가 하락으로 생기는 또 하나의 문제는 디플레이션이다. 2010년 이후 WTI 가격과 기대 인플레이션은 높은 상관관계를 보였다. 유가가 원자재를 대표해 물가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인플레 기대가 낮을 경우 기업은 투자를 축소한다. 제품가격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투자를 늘릴 이유가 없어서다. 기업활동 위축은 순차적으로 소득 감소를 통한 소비 위축을 가져와 소비위축→생산둔화→소득감소→소비위축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업종별로는 정유업이 유가 하락의 영향을 가장 크게 본다. 정유사는 원유를 사들인 후 정제 과정을 거쳐 2~3개월 후 판매하는데 유가가 급락할 경우 비싸게 사놓은 원유 재고의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석유화학업종도 문제다. 경기가 부진할 경우 석유 수요가 줄고 수출단가가 떨어진다. 산업통상자원부 발표에 따르면 2월 석유화학 부문 수출단가가 톤당 1000달러로 1년 전에 비해 173달러(14.7%) 하락했다. 중동 지역이 주요 고객인 해외 건설시장도 수주가 급감하게 된다.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4월 1∼20일 국내 건설사의 해외시장 수주 총액이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79% 감소했다. 해외 건설시장은 올 초만 해도 나쁘지 않았는데 유가 급락으로 중동 국가들의 재정이 나빠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유가가 더 떨어질 경우 산유국들이 긴축 재정에 돌입하면서 규모가 큰 건설계약이 연기되거나 무산될 가능성이 있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50달러 이상 유지돼야 수익이 나는 해양플랜트 사업도 악영향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저유가가 지속될 경우 육지에 있는 유전보다 시추 비용이 많이 드는 해양 유전이 발주 취소나 연기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2011년 이후 유가와 주가의 관계 약해져

유가와 주가 사이클은 직접적 비교가 불가능하다. 서로 연관성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유가는 한 사이클이 30년 가까이 될 정도로 긴 반면 주가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사이클이 5년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유가가 한쪽 방향으로 움직이는 동안 주가는 영향력이 더 큰 변수, 예를 들면 경기와 금리에 의해 방향이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기간을 더 잘게 나눠 경기 사이클에 맞춰야 하는데 2003~2008년 둘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유가가 상승할 때 주가도 상승하고 반대로 유가가 떨어질 때 주가도 떨어진 것이다.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들의 수요에 힘입어 유가가 상승했고, 경제 역시 신흥국 특수로 빠르게 성장했던 게 유가와 주가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든 요인이었다. 유가가 오르면서 기업이 부담하는 비용이 늘어나긴 했지만 경기가 좋아 이를 제품 가격에 전가할 수 있어 문제가 되지 않았다. 2011년 이후는 모습이 달랐다. 원자재 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선진국 주식시장이 상승했는데 유동성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경기가 나빠 원자재 가격이 하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가는 유동성 공급으로 올랐다. 당분간 유가와 주가가 따로 움직이는 상황이 계속될 걸로 전망된다.

● 이종우 전 리서치센터장 프로필

- 대우증권 리서치센터 투자전략팀장
- 한화증권, 교보증권, HMC증권, IM투자증권, IBK투자증권 등 리서치센터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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