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정주영의 성공신화 뒤돌아봐야

투자의 현인이라 불리는 워런 버핏. (사진=연합 제공)
재벌 오너체제가 갖는 장점도 분명히 있다. 기업가 정신을 제대로 갖춘 오너라면 길게 보고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사업이라도 오너가 결정한 사업은 지속 가능할 수 있지만, 월급쟁이 최고경영자(CEO)들은 그리 하기 쉽지 않다.

과거 십여 년 동안 적자였다는 반도체 사업도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회장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었고, 현대의 자동차, 조선업 성공의 이면에도 창업주 정주영 명예회장이라는 탁월한 오너 기업가가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자본주의 역사가 긴 서구 기업들은 자본시장 발달과 오너 일가 세대교체에 따른 상속세 납부 등으로 지분 분산이 광범위하게 이뤄진 결과 일반적으로 경영과 소유가 분리된 소유 지배구조 형태를 나타낸다. 따라서 주주들이 이사회를 구성하고 이들이 경영을 감독한다.

그러나 여기서 가끔 등장하는 문제가 바로 단기주의(Short-termism)의 폐해다. 즉 이사회 멤버나 경영진들이 자신들의 보수나 스톡옵션 등 이익 극대화를 위해 단기적 관점에서 경영을 하고, 동시에 단기투자 문화가 지배하는 자본시장 투자자들도 이에 동조하기 때문이다. 즉 투자자들은 단기 주가 차익(capital gain) 극대화를 위해 기업들에게 고배당, 자사주 매입 소각 등을 자주 요구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러나 서구 자본시장에서는 이러한 단기주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이 전개돼 왔다. 단적인 예로, 2014년 프랑스에서는 플로랑스(Florange)법이라는 새로운 법안 하나가 제정됐다. 이 법에 따르면 프랑스기업들은 주식을 2년 이상 보유한 투자자들에게 복수의결권을 부여할 수 있다. 장기투자자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다.

또한 지난해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기주식거래소(LTSE)라는 유가증권 시장이 개설됐다. 이 거래소에 상장되는 기업들은 반드시 장기 전략에 포커싱해야 하며, 스튜어드십과 이해관계자 요구들을 경영에 반영하고, 당연히 분기보고는 생략된다.

투자의 현인 워런 버핏도 여기에 합세하고 나섰다. 그는 제이피모건 체이스(JPMorgan Chase)와 함께 월가 기업 분석가들이 제시하는 이른바 ‘분기 가이던스’를 격렬하게 비판한다. 사업경험이 전무한 월가 애널리스트들에 의해 기업경영이 좌지우지돼서는 곤란하다는 주장이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글로벌 자산운용사 블랙락(Black Rock)의 래리 핑크 회장도 분기 단위 기업경영의 문제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국제공인재무분석사(CFA)협회도 최근 보고서를 통해 S&P500 기업들이 단기적 경영으로 인해 연간 약 790억 달러의 외부비용을 발생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3년 전 매킨지는 장기성과를 추구하는 기업이 속한 그룹이 그렇지 않은 기업그룹들에 비해 누적 매출 성장률에 있어서 약 47% 높다는 실증적인 자료를 낸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전히 오너들이 기업경영의 조타수 역할을 많이 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들이 비교적 장기적 관점에서 책임지고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소유 지배구조로 인해 고위험의 혁신적이며 공격적인 장기투자가 이뤄질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에서도 월가의 분기실적 위주의 기업경영이 당연시되는 풍토가 조성돼 왔다.

단기실적 강조하는 자본주의 퇴색…국내도 반영돼야

분기실적 드라이브와 단기 주주가치 제고가 곧 자본시장의 발전을 의미하고, 그러한 자본시장의 요구에 잘 대응하는 기업들이 곧 좋은 지배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인식되는 현상이 자리 잡아 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구의 잘못된 지배구조 및 주주 중심주의를 기계적으로 답습한 것과 다름없다.

한편 요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및 기후변화 이슈가 화두다. 그러나 이 역시도 단기투자 문화가 지배하는 자본시장에서는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반기 내지 기껏해야 1년 단위의 투자지평(time horizon)을 갖는 투자자들이 기업의 온실가스 저감, 친환경 경영, 제품 및 작업장 안전, 인적자원 관리, 그리고 기업 투명성으로 대표되는 ESG 이슈에 얼마나 관심이 있겠는가.

그 답은 자명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필자는 분기 반기 시계로 자본시장을 바라보고 분석하는 한국의 여의도 투자업계에 ESG나 기후변화를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대개 ESG를 단순히 마케팅의 소재로 활용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루션은 있다. 바로 장기 투자기금을 운용하는 국내 공적 연기금들이 제대로 나서면 된다. 이들이 민간운용업계의 근시안적 투자안목을 추종하는 것에서 벗어나 유니버설 오너라는 공적 연기금의 장기적 관점으로 그 투자철학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이미 미국 캘리포니아교직원연금(CalSTRS), 일본공적연금(GPIF), 네덜란드연기금(APG) 등 글로벌 유수의 연금들은 지난해 3월 ‘지속가능한 자본시장을 위한 우리들의 결의’를 발표하면서 장기투자에 근거한 ESG 확대를 천명하고 나섰다.

이제 세계 3위 규모의 우리 국민연금기금도 이 대열에 합류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러할 때 최근 ESG 열풍이 일과적 태풍이 아닌 지속 가능한 순풍으로 변해 우리나라의 ESG 스탠더드를 상향시킬 것이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프로필

KAIST 경영대학원 대우교수와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발전심의위원회 위원과 (사)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6년 연기금을 비롯한 기관 고객사에 ESG 분석과 운용 전략을 자문하는 ESG 전문 리서치 회사 ㈜서스틴베스트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형 사회책임투자> 등이 있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