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동일인 확정…20년 만에 ‘정의선 체제’ 공식 출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사진 현대자동차그룹)
[주간한국 송철호 기자] 현대자동차그룹의 동일인(그룹 지배하는 총수)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으로 공식 지정됐다. 2001년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그룹 총수에 오른 후 20년 만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9일 자산총액이 5조 원 이상인 공시 대상 기업집단의 동일인 지정 결과를 발표하고 정 회장을 현대차그룹 동일인으로 확정했다.

이미 지난해 10월 정 회장의 회장 취임 후 그룹의 주요 의사 결정이 정 회장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최근 미국 방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바 있는 정 회장의 이번 동일인 공식 지정으로 ‘정의선 체체’는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한미정상회담 앞서 정 회장이 미국 발걸음 한 이유는?

정 회장은 지난 17일 전용기를 타고 일주일 일정으로 갑자기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회장 취임 후 첫 해외 출장인 만큼 정 회장의 미국 방문 배경에 많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인 방문 목적은 미국 현지 판매 법인과 앨라배마 현대차 공장 등의 현지 직원들을 독려키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 달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첫 해외출장지로 미국을 선택한 점이 예사롭지는 않아 보인다. 이에 앞서 현대차그룹의 목적기반모빌리티(PBV) 강화 전략 발표 등과 맞물려 비상한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 회장이 신년 들어 ‘신성장동력으로의 대전환’을 선언한 바 있어 이번 미국 방문과 관련해 다양한 추측이 난무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 이후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을 향해 미국 내 공장을 건설해 친환경차를 공급하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하고 있다.

이번 정 회장 방문으로 현대차그룹의 미국 내 전기차 생산라인 증설이 이뤄질 가능성에 관심이 쏠린 배경이기도 하다. 게다가 미국의 다양한 미래기술 기업들과의 추가 협력도 기대되는 부분이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1분기 실적 발표를 하면서 전기차의 현지 생산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중장기적으로 한국, 유럽, 북미 지역에서 현지생산을 고려한다는 취지라는 점도 밝혔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정 회장의 이번 출장이 현대차 아이오닉5와 기아 EV6의 미국 현지 생산라인 구축 상황을 점검하려는 차원일 것이라고 관측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자율주행기술합작사인 모셔널 관계자를 접촉해 아이오닉5를 활용한 전기택시 사업을 검토했을 가능성까지 점쳐지는 상황이다.

이는 정 회장의 미래기술 역량 확보와 관련한 지속적인 관심에서 비롯됐다. 정 회장은 “자유로운 이동과 평화로운 삶을 위한 신기술에 대한 투자도 지속적으로 확대해 미래시장을 선점하겠다”며 “전기차뿐만 아니라 자율주행, 커넥티비티, 그리고 소프트웨어 역량을 강화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혁신적인 모빌리티 기술을 구현해 나가겠다”고 꾸준히 강조하고 있다.

정 회장은 또 “도심항공교통(UAM), 로보틱스와 같은 신성장 분야에 대한 투자를 지속할 것”이라며 “멀지 않은 미래에 새로운 모빌리티 영역을 확대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해 나갈 것”이라고 거듭 밝힌 바 있다.

현대차그룹은 미래 모빌리티 역량을 위해 2025년까지 60조 원을 투자하고 미래 기술 확보를 위해 인수합병(M&A) 및 합작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더 나아가 ‘수소사회’를 앞세워 수소 생태계 구축에도 주력하고 있다.

정 회장의 미래기술에 대한 관심은 그의 전략가적 기질을 발휘하는 동력이 됐다. 현대차그룹은 삼성·SK·LG·롯데 등 국내 기업은 물론 해외 기업과 적극적인 미래차 협력을 위한 동맹 결성에 나섰다.

정 회장은 이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그룹총수를 만나 미래차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이는 아이오닉5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전기차 생산을 시작하는 현대차그룹의 행보와 맞물려 있다.

2019년 미국 PGA 투어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 대회 협약식에서 함께 기념촬영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왼쪽에서 첫번째)과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왼쪽에서 세번째). (사진 현대자동차그룹)
곳곳에서 묻어 나오는 전략가적 면모

정 회장은 1970년 10월 18일 서울에서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일찌감치 정 명예회장으로부터 현대차그룹의 경영권 승계자로 결정되면서 다양한 직책을 맡아 후계자 수업을 충실하게 마쳤다.

정 회장은 KIA 타이거즈, 전북 현대 모터스의 구단주이기도 하다. 2005년부터는 대한양궁협회장, 아시아양궁연맹 회장도 맡는 등 스포츠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스포츠 각 분야에 ‘통큰’ 투자를 하면서도 사사롭게 개입하는 사례가 없어 호평을 받고 있다.

스포츠계의 한 관계자는 “정 회장은 스포츠에 관심이 많고 각 종목에 투자도 확실히 하고 있지만 선수단의 일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대개 프로구단을 보유한 구단주들은 선수단에 상당한 개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 회장은 구단주와 선수단의 영역을 확실하게 보장해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축구에 대한 관심은 상당해서 전북 현대 모터스의 감독과 선수들은 정 회장으로부터 선물 공세를 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정 회장은 지난해 이동국 선수의 은퇴식에 참석해 킥오프 때부터 은퇴식까지 자리를 지켜 화제가 됐다.

정 회장은 이동국 선수에게 직접 감사패를 전달했고 신형 미니밴 교환권을 전달해 눈길을 끌었다. 당시에는 단순히 스타렉스 후속 모델로 알려졌지만 뒤늦게 현대차 전략 미니밴으로 불리는 MPV(다목적 차량) 스타리아로 알려지면서 더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젊은 총수로서 정 회장은 순수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매스컴에 좀 더 과감하게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면서 “단순히 솔직한 감정 표현일 수도 있지만 적정선을 지키며 필요할 때는 스포츠 등을 영리하게 홍보수단으로 활용하는 전략가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 회장의 전략가적 면모는 실제 경영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2017년 11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생산된 코나 EV(7만5680대)와 아이오닉 EV(5716대), 일렉시티 버스(305대) 등 총 8만1701대를 전 세계에서 리콜 조치했다. 국내의 경우 리콜 대상은 코나 EV 2만5083대, 아이오닉 EV 1314대, 일렉시티 302대 등 총 2만6699대다.

해당 차종은 국토교통부 조사 결과 LG에너지솔루션 중국 난징 공장에서 초기 생산된 고전압 배터리 일부에서 셀 제조 불량에 따른 내부합선으로 화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확인됐다. 양사는 이번에 해당 기간에 생산된 차량의 고전압 배터리 시스템(BSA)을 모두 교체키로 했다. 모두 8만대 이상의 리콜 물량이기에 정 회장의 과감한 결단이 아니면 쉽게 추진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현대차그룹이 코나 EV 배터리 전량 교체를 결정한 가운데 LG에너지솔루션과 1조 원에 달하는 리콜 비용 분담에 합의한 것이 큰 주목을 받았다. 현대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의 분담비율은 3대7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고 이에 따라 현대차는 4200여억 원을, LG에너지솔루션은 9800여억 원을 리콜 비용으로 분담키로 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LG에너지솔루션과 고객 불편 및 시장 혼선을 최소화해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하고 리콜 비용 분담에 원만히 합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로 자동차업계는 “이런 유형의 리콜 조치의 경우 불량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이 제기되기 때문에 관련 업체 간 비용 분담 합의가 장기화될 수 있다”면서 정 회장의 기업 간 협력관계 전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현대차가 모든 책임을 LG에너지솔루션측에 전가했다면 신속한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월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정부 신년합동인사회에 참석한 (왼쪽부터)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당시 수석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 연합뉴스)
주력했던 조직 문화 혁신…新 노조 출범으로 난항 예상

정 회장은 회장 취임 전부터 조직 문화 혁신에 주력하고 있다. 정 회장은 지난 3월 16일 오후 ‘현대자동차그룹의 미래 이야기’를 주제로 온라인 타운홀 미팅을 가졌다. 정 회장이 타운홀 미팅을 통해 임직원들과 소통에 나선 것은 2019년 10월 이후 두 번째다.

특히 정 회장은 타운홀 미팅에 앞서 SK하이닉스 성과급 논란이 발생한 것을 의식해 현대차그룹 내부에서도 확산되고 있는 ‘직원 처우’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정 회장은 최근 국내 주요 대기업을 중심으로 성과급 불만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과 관련해 “많이 노력해 주신 직원 분들이 회사에 기여한 것에 비해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어 굉장히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더 투명한 성과급 지급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중심의 사원들의 공공연한 불만이 제기되는 등 역풍을 맞기도 했다.

정 회장은 회장 취임 후 단행한 첫 임원인사에서 능력과 성과를 중심에 두면서 미래 모빌리티 역량을 강화키 위해 내부 조직을 재편했다. 재편 과정에서 세대교체를 통해 젊은 경영진을 전면 배치하면서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채비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전기차 시대에 걸맞은 실무를 중심으로 현대차는 물론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특성에 맞는 전문가를 경영진으로 배치하는 모습도 선보였다.

정 회장은 이미 조직 문화 혁신에 대해 수석부회장 시절부터 확고한 소신을 보였다. 정 회장은 지난해 신년회에서 “미래 시장 리더십 확보의 원동력은 바로 우리”라며 “거대한 조직의 단순한 일원이 아니라 한 분 한 분 모두가 스타트업의 창업가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창의적 사고와 도전적 실행을 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한 바 있다.

정 회장은 또 “저부터 솔선수범해 여러분과의 수평적 소통을 확대하고 개개인의 다양한 개성과 역량이 어우러지는 조직 문화가 정착되도록 하겠다”며 “그룹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와의 활발한 소통과 협력을 통해 다양한 시너지를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MZ세대가 주도한 현대차그룹 사무연구직 노조가 지난 26일 출범하면서 정 회장 행보에 난항이 예상된다. 이 노조의 공식 명칭은 ‘현대자동차그룹 인재존중 사무연구직 노동조합’이며 노조위원장은 현대차그룹 자동차부품 계열사인 현대케피코의 이건우(27세, 입사 2년 차) 매니저가 맡았다.

이 노조위원장은 “기존 노조는 생산직의 권익이 우선이었고 사무연구직의 목소리가 잘 반영되지 못했다”며 “새로 출범하는 노조는 의사결정 시 통계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한다는 것이 기존 노조와 가장 차별화되는 부분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사무연구직 노조가 별도 교섭권을 인정받으려면 노동위원회로부터 교섭단위 분리 필요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사무연구직 노조가 임금 인상, 근무 환경 개선 등을 요구하려면 결국 회사와 교섭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이전까지는 단체 행동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정 회장 입장에서 큰 숙제가 주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회장 취임 전부터 조직 문화 혁신에 주력했고 임직원들과 소통을 약속하며 꾸준히 타운홀 미팅을 열었던 정 회장은 사무연구직 노조의 탄생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물론 정 회장의 조직 문화에 대한 소신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새로운 노조가 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무연구직 노조 출범 이유 자체가 기존 조직 문화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향후 정 회장의 조직 혁신 행보가 어떻게 진행될지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송철호 기자 song@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