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의 개그펀치] 엄마의 고백


대학에 다닐 때 였다. 학교 구석에 연못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뭐하고 커다란 웅덩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가깝지만 하여튼 연못 비슷한 게 있었다. 학생들이 자주 그 주위에 둘러앉아 얘기도 나누고 술자리도 나누던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대낮부터 술에 취한 남학생 하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오더니 후배 여학생과 장난을 하다가 연못으로 밀어서 빠뜨렸다. 둘 다 과 후배였는데 순간적으로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싸늘해졌다.

여학생을 빠뜨린 놈도 뒤늦게야 엄청난 실수를 깨달았는지 누렇게 뜬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악취가 풍기는 물에 온몸을 적신 여학생은 잠시 연못에 서있더니 아무 말 없이 걸어나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기를 물에 빠뜨린 남학생을 와락 안아버리는 것이다. “에잇, 선배도 당해봐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고 즉시 연못가에서 술파티를 벌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녀석이 당연히 성질을 부리면서 울었거나 화를 냈다면 따뜻했던 오후의 망중한은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고 당사자인 남학생과는 어쩌면 오래도록 불편한 관계로 지낼 수도 있었는데 그 여자 후배는 그 모든 문제거리를 단 한방의 제스처로 날려버린 것이다. 그 뒤로 나는 그 여자 후배를 참 이뻐했다. 예쁘고 몸매가 좋았던 다른 여학생들보다 그 여자 후배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묻는다. 주변 사람들과의 친화력을 위해서 유머감각을 발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비결을 가르쳐 달란다. 얼굴이 좀 덜 생긴 남자도 유머감각이 뛰어난 사람은 여자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사실 유머감각이란건 어느 정도 타고난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똑같은 얘기를 해도 어떤 이가 하면 별로 재미가 없고 또 어떤 이가 하면 뒤집어지게 웃기게 들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별로 의도하지 않았는데 한마디씩 툭 내던지는 말이 기막힐 정도로 타이밍이 들어맞아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그런 재주를 타고나지 못했다고 의기소침해 있는 사람들은 사업 때문에, 인간관계 때문에, 멋진 애인을 만나고 싶어서 일부러 돈을 내고 유머감각을 키우기 위해서 학원을 다니기도 한다. 학습적인 반복과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로 남들을 웃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누군가를 웃겨야 한다고 작정하고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정작 본인은 속으로 긴장을 하고 웃겨줄 레퍼토리를 고민하고 세간에 떠도는 수많은 유머들을 종합적으로 편집하다보면 정작 그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머리털이 빠지도록 연구해서 웃음의 종합선물세트를 내놓았는데 반응이 신통치 않아도 죽을 맛일 것이다.

그렇다고 원래 성격대로 뚱하니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웃음이란 상대방을 위한 따뜻한 배려와 마음 씀씀이에서 시작된다. 타인을 생각해주는 바로 그 순간에 어설픈 우리의 유머감각은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머라도 잘 가려서 해야지 자칫 하다가는 내 친구처럼 평생 의문점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도 있다. 요즘에도 그런 학생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학생일 때는 종종 성적표를 위조하는 경우가 있었다. 인사동에 가면 각종 상장이나 성적표를 인쇄해서 파는 곳이 있었는데 밑바닥을 맴도는 성적표를 받아든 친구는 고민을 하다가 결국 성적표를 위조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친구는 어머니에게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엄마, 사실대로 말하면 안 때릴거지?”

“그럼.”

“약속한거야. 정말 때리면 안돼. 엄마, 고백하는데 사실 나 성적표 위조 했거든요.”

이럴 때 대부분의 어머니는 굳은 약속을 파기하고 두들겨 패는게 다반사인데 친구의 어머니는 달랐다. 어머니는 친구를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더니 말씀을 하셨다. “얘야, 나도 고백할게 있는데 사실 난 니 친엄마가 아니다.”

그 후로 친구는 가끔 진실이 무엇인지 심각한 고민을 한다고 또 고백을 하고 말았다.

장덕균


입력시간 : 2003-09-30 14:38


장덕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