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고 거포로 등극한 국민타자, 한국 야구사 새로 쓴다

한국엔 이승엽이 있다
아시아 최고 거포로 등극한 국민타자, 한국 야구사 새로 쓴다

‘국민타자’ 이승엽(삼성ㆍ27)이 39년을 태산처럼 버텨온 아시아 최고봉에 마침내 올라섰다. 지난 1999년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로 홈런포를 쏘아올렸으나 일본의 왕정치(일본명 오 사다하루)가 64년에 수립한 한 시즌 아시아 홈런 최다기록인 55개 고지의 한발 앞에서 물러나 아쉬움을 남겼던 이승엽은 4년 만에 드디어 아시아 최고 거포 명함을 받아냈다.

하지만 적잖은 국내 야구팬들이 이승엽의 기록에 대해 ‘평가절하’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 일본보다 야구 수준이 낮은 국내에서 이룬 기록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는 것이다. 이런 논란은 어찌 보면 이승엽의 미국 진출후 활약 여부에 따라 마침표가 찍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금껏 쌓아올린 금자탑의 의미를 훼손해서는 안될 것이다.

야구 전문가들 역시 “리그가 달라 수평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기록 경기인 야구에서 이승엽이 이룩한 업적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왜 이승엽은 특별한 타자일까? 베이브 루스(미국), 왕정치(일본) 등 시공을 초월해 세계를 대표하는 홈런타자 2인과 이승엽의 기록과 족적을 살펴, 그에 대한 해답을 얻어본다.


야구의전설 베이브 루스

야구 본토 미국에서는 아직까지 절대 다수의 팬들이 베이브 루스(1895~1948ㆍ전 뉴욕 양키스)를 ‘최고의 타자’로 여긴다. 세상을 떠난 지 55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통산 714개 홈런과 2,212타점은 각각 역대 2위로 남은 불멸의 위업이다. 하지만 기록상으로 여전히‘2위’. 메이저리그 통산 홈런(755)과 타점(2,297)분야 1위는 76년에 은퇴한 행크 애런(69ㆍ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몫이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이 ‘1위’를 제쳐놓고 ‘2위’인 베이브 루스를 더 추앙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답은 선수의 스타성에서 찾을 수 있다. 행크 애런은 23년의 선수생활 동안 기복 없이 꾸준한 활약을 펼친 성실한 선수의 대명사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는 단 한 시즌에도 50홈런을 넘기지 못했다. MVP 역시 57년 단 한차례에 그쳤다. 강인하거나 화려한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다. 통산 기록에서 누구도 넘기 힘든 업적을 남겼지만 언론과 팬들로부터 ‘저평가’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베이브 루스는 다르다. 그가 ‘전설의 타자’로 인정 받는 것은 동시대 선수들을 훨씬 뛰어넘는 ‘혁명아’ 였기 때문. 베이브 루스가 타자로서 진가를 알리기 시작하던 1920년대 초는 고작 10여 개의 대포만 쏘아올려도 홈런타자로 대우 받던 시절이다. 하지만 그는 당시 무려 50여 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강타자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한 시즌 50홈런은 힘과 기술, 야구 장비가 괄목할 만큼 발전한 요즘에도 아무나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투수로서도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사실. 베이브 루스는 뉴욕 양키스로 팀을 옮기기 전인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투수로서 6시즌 동안 뛰며 89승이라는 빼어난 성적을 남겼다. 통산 방어율도 2.28이었으니 특급 투수였다.

이 같은 기록만이 베이브 루스를 위대한 선수로 추억하게끔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그런’ 성적에 머물던 뉴욕 양키스를 미국 최고의 명문구단으로 발돋움시켰을 뿐 아니라, 대공황에 신음하던 미국인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안겨줬다. 게다가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겪었던 탓인지 어린이들에게 유독 친절해 국민의 찬사를 받았다. 그가 병상에 있는 어린이 팬을 위해 터뜨린 ‘예고 홈런’은 베이브 루스가 왜 영원한 스타로 남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본 야구의 자존심 왕정치

이승엽의 1,2차 홈런쇼가 펼쳐지는 동안 줄곧 비교와 극복의 대상으로 거론됐던 왕정치(63ㆍ현 다이에 호크스 감독.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 그는 대만 출신 선수다. 아직도 대만 국적을 버리지 않고 있으니 일본 야구팬들에겐 ‘용병’인 셈이다. 그럼에도 일본 프로야구를 왕정치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그가 현대 일본 야구에서 얼마나 절대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왕정치는 1964년 약관 스물 넷의 나이에 55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아시아 야구사를 다시 썼고, 그 기록은 이승엽의 도전을 받기 전까지는 ‘성역’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위대성은 통산기록에서도 증명된다. 프로 4년차이던 62년 ‘외다리 타법’ 이라는 고유의 무기를 선보이며 첫 홈런왕에 오른 후 13년 동안이나 왕좌를 내주지 않았을 만큼 독보적인 ‘홈런 황제’였다. 22년 간의 현역생활을 접고 은퇴한 80년까지 그가 만들어낸 기록은 찬란하기 그지 없다. 홈런왕 15회, 타점왕 13회, 타격왕 5회, MVP 9회 등등.

무엇보다 그를 돋보이게 한 것은 역시 868개라는 세계 최다 홈런 기록. 일본을 한 수 아래로 보는 야구 종주국 미국이 그 가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지만, 왕정치의 기록은 기네스북의 한 페이지를 엄연히 장식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왕정치를 존경하고 그의 기록을 소중히 여기는 데는 이처럼 ‘미국과의 경쟁’에서 이긴 선수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한다. 야구의 부문별 기록에서 일본도 연륜에 걸맞은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지만, 미국을 앞서는 것은 홈런이 거의 유일하다.

터피 로즈나 알렉스 카브레라 등 ‘코쟁이’ 용병들이 2001, 2002 시즌 연속으로 왕정치의 55홈런 기록 경신에 도전했지만, 상대 투수의 집중 견제와 여론의 부담에 시달려 끝내 타이에 머물고 만 것도 일본인들이 ‘왕정치 신화’를 얼마나 중시하는 지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일본 야구의 자존심을 세워준 왕정치는 외국인 운동선수로는 드물게 일왕으로부터 국민훈장을 받았고, 60~7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O-N포’로 동시에 이름을 날렸던 나가시마 시게오 현 일본 대표팀 감독과 함께 변함없는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 야구사 새 지평 연 이승엽

타격의 달인(장효조), 해결사(한대화), 괴물타자(양준혁), 야구천재(이종범). 80~90년대를 주름잡은 한국 프로야구 톱스타들의 애칭들이다. 모두 뛰어난 야구 실력과 흥행성으로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국민타자’라는 최상급 호칭을 얻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이승엽은 왜 국민타자로 불리는가? 이승엽은 이만수에서 장종훈으로 이어지는 홈런왕 계보의 바통을 물려받았지만 그 차원을 달리해 한국 야구의 새 지평을 연 주인공이다. 99년 그가 기록한 54홈런은 50홈런 시대의 본격 개막을 알렸고 타자들의 동반 업그레이드를 불러온 기폭제였다.

그가 주도한 ‘홈런 신드롬’은 또 침체 일로의 프로야구에 르네상스를 가져왔고, 올해 달성한 세계 최연소 300홈런, 한 시즌 아시아 홈런 최다기록 등은 국내 팬들에게 ‘우리도 세계 수준의 타자를 보유했다’는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홈런만 많이 때린다고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베이브 루스나 왕정치의 예에서 보듯 이승엽의 홈런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야구팬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고, 나아가 국민 자존심이나 국가 통합 같은 거시적 가치를 발현하는 일들이 그의 방망이 끝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승엽이 55홈런을 터뜨린 25일 광주 경기에서 기아 팬들이 기립박수를 보낸 것과 56홈런을 고대한 부산의 롯데팬들이 홈팀의 고의사구를 비난하며 ‘난동’을 부린 장면은 역설적이지만, 그가 지역 연고를 뛰어넘은 ‘국민타자’라는 사실을 반증한 것이다.

김윤현 기자


입력시간 : 2003-10-07 14:26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