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최고 골잡이 '토종이냐? 용병이냐? 치열한 싸움
"30골 득점왕시대 열려야" K리그 최고 골잡이 '토종이냐? 용병이냐? 치열한 싸움
시즌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2003 삼성 하우젠 K 리그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우선 김도훈(33ㆍ성남 일화)과 마그노(27ㆍ전북 현대)가 뜨겁게 벌이고 있는 득점왕 경쟁이다. 또 누가 '황금발'에 등극할 지에 대한 궁금증 역시 식을 줄 모른다. 어느 시즌이건 매한가지이지만 올해의 득점 레이스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띠고 있다. 한 시즌 정규 리그 최다골 기록 경신이 눈앞에 다가 와 있기 때문이다. 올 시즌 전까지는 1994년에 21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에 올랐던 윤상철(39ㆍ은퇴ㆍ전 안양 LG)이 정규 리그 최다골 기록을 9년 간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도훈과 마그노가 11일 현재 나란히 21골 타이 기록을 세운 상태인 데다, 두 선수 모두 8~9경기를 남겨두고 있어 지금의 페이스라면 신기록 달성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지만 다른 선수에 자리를 양보해주는 기록 보유자의 마음은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 선배 윤 씨로부터 김도훈-마그노 두 선수의 득점 레이스를 지켜 본 소회를 들어 봤다. 자신의 9년 아성을 깨뜨리기 위해 뛰고 있는 후배 아닌가.
지난 10일 저녁 무렵 전화로 만난 윤 씨는 온 종일에 걸친 빡빡한 일과에 지친 듯 피곤한 목소리였지만 역사의 저편으로 저물 자신의 기록을 크게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기록은 갱신되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자꾸 새 기록이 나와 줘야 한국 축구도 발전할 수 있는 겁니다." 한국 축구의 기름진 토양이 될 수만 있다면 자신의 기록쯤은 얼마든지 밟고 지나가도 괜찮다는 것이다. "제 기록을 대기록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고도 했다. 장강의 뒷물결에 자리를 내 주는 앞물결을 떠올리게 하는 겸손함이다. 김도훈이 21호골을 터뜨리기 전, 두 사람은 파주 NFC(축구 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에서 우연히 만날 기회를 가졌다. 각별한 선후배 사이는 아니지만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윤 씨는 "열심히 뛰어 반드시 내 기록을 넘어서라"며 덕담을 건넸다고 한다. 기록 갱신도 중요하지만, 이왕이면 김도훈과 같은 토종 스트라이커가 그 일을 해냈으면 하는 것 또한 윤 씨의 솔직한 바람이다. 그러잖아도 근래 몇 년간 K리그 득점 레이스가 외국인 선수들의 잔치판으로 전락한 터에 이번 대기록 작성마저 그들의 발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선배 골게터의 충심인 것이다. 윤 씨는 단순히 '같은 핏줄'이라서 김도훈을 미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 득점왕에 등극할 가능성도 김도훈에게 더 많다는 나름의 전망을 갖고 있다. 축구는 팀 스포츠인 만큼 소속팀 형편이 선수 개인 능력 이상의 변수다. 성남은 올 시즌 1위를 거의 굳히며 정규리그 3연패를 바라보고 있다. 명실공히 K리그 최고의 전력을 갖춰 '한국의 레알 마드리드'로 불리는 강팀. 반면 전북은 수원, 전남 등과 승점 1~2점 안팎 차이로 3~5위권에서 치열한 중위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기는 경기를 하는 강팀에게 골 찬스가 자주 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김도훈은 샤샤, 이성남, 신태용, 김대의 등 막강 공격 라인의 든든한 측면 지원을 받는다. 이들이 김도훈에게 찔러 주는 정확한 어시스트는 한 골이나 다름없다. 이에 비해 전북의 마그노는 브라질 출신답게 현란한 테크닉과 센스를 가졌지만, 스스로 골 찬스를 개척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에드밀손 같은 훌륭한 공격 도우미가 있기는 하지만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김도훈에 비해 지원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는다는 평가다. 윤 씨는 마그노의 뛰어난 기량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점 때문에 김도훈의 우위를 점치는 것이다. 성남이 김도훈 MVP 만들기에 나설 조짐을 보이는 것도 긍정적인 요소. 하지만 성남의 우승이 일찌감치 확정돼 동료 선수들의 플레이가 느슨해진다면 의외로 김도훈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 윤 씨의 지적이다. 한편 윤 씨는 한국 축구도 이제 한 시즌 30골 득점왕이 나와야 할 때라고 말한다. 경기수도 자신이 뛰던 때보다 훨씬 많아진 데다 리그의 연륜도 깊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해 월드컵 성공과 더불어 서울팀 추가 창단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등 한국 축구의 외형이 크게 달라졌음에도 해묵은 기록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김도훈 이후를 책임질 만한 골게터를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김도훈은 올 시즌 경기당 득점 0.64점을 기록하는 놀라운 페이스를 보이고 있지만, 그를 추격하는 국내 선수 중 5위권에 올라 있는 우성용의 경우는 경기당 0.41점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도훈이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막판 피치를 올린다면 올해 30골 첫 테이프를 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도훈이를 끝으로 용병과 경쟁할 만한 선수가 당분간 나오기 힘들 것이다. 현재 국내축구는 한마디로 스트라이커 부재 상황이다. 각급 대표팀을 훑어봐도 골 감각이 출중한 선수를 찾기 어렵다." 윤 씨의 깊은 탄식이다. 이런 상황의 배경으로 윤 씨는, 대부분 팀들이 당장의 성적에 급급해 골 결정력을 갖춘 용병들을 포워드로 기용하는 관행을 꼬집었다. 한국 축구 스스로가 토종 선수의 스트라이커 성장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것이다. 스트라이커 부재의 해결책은 결국 한국 축구 자신의 손에 쥐어있는 셈이다. 윤 씨는 이를 위해 축구협회 등의 제도개선 노력도 있어야겠지만 언론의 애정어린 관심도 절실하다고 호소한다. "이승엽 선수가 홈런 신기록을 앞두고 있을 때는 모든 언론이 도배질 하다시피 보도했는데 김도훈 선수의 골 퍼레이드는 어떤 대우를 받았죠?" 그의 쓴소리다. 마지막으로 윤 씨에게 자존심을 건드릴 지도 모를 질문을 던져보았다. "지금껏 세웠던 기록과 올 시즌 달성될 기록 중 어느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세요?" "글쎄, 내가 뛸 때는 팀간 전력 차이가 적었던 데다 경기수도 적었으니까…. 아니, 과거는 과거고 앞으로 잘 뛰는 선수들이나 많이 조명해 주세요!" 최근 대한축구협회 2급 지도자 과정을 밟으면서 보조 강사를 겸하는 등 배움과 가르침의 길을 동시에 걷고 있는 윤씨의 당부가 범상하지 않다. 차범근 축구교실에서 코치로 활동하며 유소년 재목들을 육성하기도 했던 세월의 무게가 실려 있다.
입력시간 : 2003-10-16 15:20
|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