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사랑과 낭만

[영화되돌리기] 동정없는 세상
백수의 사랑과 낭만

낭만의 도시 파리의 거리를 수놓는 것은 파리지엔이 내뿜는 화려한 향수냄새도, 감미로운 쇼팽의 왈츠도 아닌 개똥이라고 했던가? 에펠탑과 세느강, 노천카페 등으로 예술가의 짙은 애수와 여유를 풍기는 파리에는 사실 이방인이 모르는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 있다. 그런데 개똥만큼 낯선 그들의 또 다른 삶의 방식이 바로 ‘실업’이다.

프랑스는 사랑스런 애완견만큼이나 실업(실업자)을 껴안고 가는 나라이다. 지난 20년간 꾸준히 10%가 넘는 실업률을 보이고 있는 프랑스에서는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 장기 실업자가 한 명은 있을 정도라고 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가세에 보탬이 안 되는 못난 동생 끌어안듯, 실업자를 구제하는 일은 사회와 가정이 당연히 치러내야 할 의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사회와 가정에서 구박덩이일 것 같은 이들 실업자들은 때로는 뻔뻔스러울 만큼 당당하다. 영화 ‘동정없는 세상’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처럼 말이다.

영화의 배경은 90년대 프랑스 파리. 대학을 중퇴한 주인공 이뽀는 고등학교 동생에게 빌붙어 사는 한심한 한량이다. 가끔 돈이 궁할 때는 도박을 하거나 마약거래로 돈을 버는 동생에게 손을 벌리지만 한번도 자신의 삶이 궁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이뽀는 암울한 시대현실에 좌절하고 탐미주의에 빠져버린 예술가라도 되는 양 기생충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낭만적인 연애에 탐닉한다. 유럽이 통합되고 동구권이 부활해도 여전히 노동자는 착취당하는 불안한 시대에 사랑밖에 남은 것은 없다고 외치며.

그런데 놀고 먹는 백수인 그가 사랑에 빠진 상대는 교수를 꿈꾸는 대학원생이자 러시아어 동시통역사 나탈리이다. 안정된 삶을 꿈꾸는 인텔리 여자와 백수건달 남자의 사랑.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와 호모 파베르(생산하는 인간)로서 삶의 대척점에 선 두 남녀는 과연 그들 사이에 놓여진 생의 간극을 좁혀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역시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 제목도 ‘동정없는 세상’, 즉 ‘냉혹한 세상, 인정사정 보지 않는 세상’이 아니던가.

영화 속 주인공 이뽀가 숨쉬었던 그 시절 프랑스에는 300만명이 넘는 실업자가 방황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저임금을 받고서라도 노동을 했을테고 시절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찬 몇몇은 실업수당이나 최저생활보조금(RMI)에 의존하며 근근이 버텼을 것이다. 특히 일정한 수입이 없는 25세 이상의 프랑스인들에게 국가가 지급하는 RMI는 주인공 이뽀처럼 무위도식하는 프랑스인들에게 생존의 유일한 희망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국가 재정을 좀먹는 게으른 실업자들까지 가세해 프랑스의 실업문제는 프랑스의 좌우파를 막론하고 풀기 어려운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 후 좌파정권인 죠스팽 내각이 내건 방안이 바로 ‘35시간 노동제’. 일종의 ‘일자리 나누기’인 이 제도는 사실상 불완전 고용만 심화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실업문제를 국가와 사회, 개인이 연대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정부의 원칙은 재확인할 수 있었다. 실업은 결코 나태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사회 경제의 문제라는 것이 프랑스인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뻔뻔스럽게 당당한 백수건달 이뽀. 그는 무직상태를 비관해서 자신의 무능력을 자학하거나 사회의 무책임함을 탓하려 들지 않는다.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받은 이상 백수도 그가 택한 삶의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무숙자들도 자신들만의 신문을 만들어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는 프랑스. 실업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지 않는 사회에서는 실업자도 홈리스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모양이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3-10-31 13:23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