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잡이들의 낭만과 향수

[영화되돌리기] 사무라이 픽션
칼잡이들의 낭만과 향수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을 다룬 한일 합작영화 ‘KT’는 일본의 탐미주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자결사건으로 시작된다. ‘자위대의 군국화’와 ‘천왕옹호’를 주장한 일본 우익세력의 정신적 지주인 미시마 유키오. 그는 일본 정신의 원형을 사무라이 정신(무사도)이라고 보고 전후 일본 사회에 사무라이 정신을 고취시킨 자다.

사무라이 정신은 원래 주군에 대한 충성과 무를 중시하는 유교사회의 지배이념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우익세력에 의해 변질되면서 일본에서 군국주의 망령이 부활할 때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다.

이 사무라이 정신이 영화계에서 다시 부활하고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에서부터 톰 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까지 사무라이들의 절제된 무술과 주군에 대한 변치않는 충성심이 과잉의 물질주의와 신념의 훼절이 판치는 현대사회에 신선한 자극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군국주의의 망령이 떠오르는 우리에게는 불편한 영화가 될 수도 있겠다.)

특히 개봉을 앞둔 두 편의 사무라이 영화(라스트 사무라이, 바람의 검 신선조)가 막부시대 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사무라이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시절에 대한 궁금증까지 자아내고 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에 의해 도쿠가와 체제가 붕괴되던 그 시절 사무라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붕괴의 조짐이 엿보이던 태평성대의 에도막부 시대를 더듬어볼 필요도 있다.

나카노 히로유키 감독의 영화 <사무라이 픽션>에는 태평성대 시절에 대량실업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사무라이들의 불안한 현실이 나타나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696년. 주인공 헤이시로의 아버지이자 나가시마번의 가신 칸젠은 영주에게 하사받은 보검을 도난 당한다. 보검을 훔친 자는 카자마츠리 란노스케라는 사무라이.

그는 출중한 무술실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검을 지켜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품고 있는 시대의 반동인물이었다. 사실 오랜 전란 이후 평화를 구가하던 도쿠가와 막부시대는 사무라이들의 존재이유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시점이다. 무사의 지위가 떨어지자 대부분은 행정관료로서 일자리를 찾거나 그마저 여의치 않을 경우는 낭인무사가 되어 산천을 떠돌아다녀야만 했다. 카자마츠리는 한직으로 좌천된 현실에 불만을 갖고 낭인의 무사를 자처한 사내였다.

영화는 주인공 헤이시로가 쇼군(장군)의 보검을 탈환하기 위해 카자마츠리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헤이시로는 비운의 사무라이 미조구치 한베를 만난다. 미조구치 한베는 카자마츠리와 검을 겨룰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실력을 지녔지만, 살생을 하지 않으려는 사무라이 아닌 사무라이이다.

평화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검을 놓지 못하는 카자마츠리와 사무라이의 특권인 ‘기리스테고멘’(칼로 살생을 할 수 있는 권리)을 포기한 미조구치 한베, 이들은 사라져가는 검의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견뎌내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결국 검을 놓지 않으려는 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진다. 시절과 화합하지 못한 마지막 사무라이들의 비극적 운명. 사무라이 영화들은 대개 이를 낭만과 향수로 풀어나간다.

사무라이 정신은 분명 우리에게 불편한 정서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자살을 하고 카미카제 특공대가 자살 테러를 할 때 그들이 부르짖었을 과잉 충복의 정신이 우리가 역사 속에서 기억하고 있는 무사도이다. 하지만 영화 <사무라이 픽션>을 통해 역사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던 비운의 사무라이들을 만난다면 그들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3-12-17 17:20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