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만에 무대에 선 보물같은 싱어송 라이터

[추억의 LP 여행] 김광희(下)
34년만에 무대에 선 보물같은 싱어송 라이터

대중적으로 '세노야'를 널리 알린 것은 당시 대학생 포크 가수 양희은이었다.

"제가 노래한 '세노야'를 라디오를 통해 들은 희은씨가 잘 부른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1970년 겨울 종로 YMCA 건물에서 콘서트 소식을 듣고 찾아 갔지요. 그 때 무대 뒤에서 우리 두 사람은 처음 만났고 친해졌어요. 그 인연으로 양희은씨가 음반을 발표할 때마다 곡을 하나씩 써 주게 된 겁니다" 양희은은 '세노야' 말고도 멧돌 포크 공연에서 김광희곡 '빈자리'를 불러 취입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의 곡 '나의 친구'는 서울대 미대 후배들이었던 여대생 포크 듀엣 '현경과 영애'도 '내 친구'로 제목을 바꿔 불렀다. 온 국민이 사랑하게 된 '세노야'는 80년대에 들어서도 KBS에서 같은 제목으로 방송된 송지나 작의 일일 연속극에서 주제곡으로 사용되었다.

김광희는 70년대 초 여러 포크 가수들의 앨범 작업에 참여해 도움을 주었다. 김민기의 71년 데뷔 앨범 작업 때는 피아노를 연주했고, 2년 뒤에는 양희은의 2집 앨범에 참여했다. 수록 곡 '인형' 중간 중간에 나오는 웃음 소리는 그녀의 목소리. 하지만 정작 자신은 단 한 장의 독집 음반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녀는 프로 포크 가수 활동보다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가사 말에 곡을 붙여 몇 곡의 포크 송을 작곡하고, 음악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노래하는 범주를 벗어 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육성 녹음한 단 한 곡이 수록된 음반이 있다.

우연히 퓰리쳐상을 수상한 미국의 여류 시인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시를 접하고 감명을 받아 작곡한 동명의 노래 '나 돌아 가리라'이다. "작고한 어느 재벌은 이 노래를 듣고 '마음을 다 비우게 해주는 노래'라며 생전에 즐겨 들어 지금도 기일마다 후손들이 이 노래를 튼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마도 가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노래는 대학생 싱어 송 라이터들의 집결지였던 내쉬빌의 멤버들이 참여해 제작했던 포크의 명반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노래-유니버샬,1972'에 수록되어 있다. 대학생 작곡가들이 직접 노래를 불러 발표한 최초의 음반이었다. 기획자는 경기고 출신인 이수일, 김무영(작고), 가난했지만 음악적 기둥이었던 김유복 등 3명의 내쉬빌 주인들.

이들은 김민기의 데뷔 음반을 듣고 충격을 받아 이 음반을 기획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광희는 이따금 내쉬빌에서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멀리 수원에서 개최한 '우리들' 공연에는 엄격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불참했다.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녹음에만 참여했어요.

음반으로 500장을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 100만원이 넘는 한국 포크 3대 명반으로 대접받는 이 음반은 당시 제작에 참여한 학생가수들이 나눠 가지고 일부는 대학가 앞 서점에서 판매되었다. 김광희의 '나 돌아가리라'는 후에 '가난한 마음'으로 제목을 수정해 양희은이 재취입하여 빅히트를 기록했다.

서울음대 졸업 후 마지막으로 작곡한 노래는 '님이 오시는 날'. 1976년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떠날 때 서라벌 레코드사를 통해 양희은이 발표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컨셉을 통해 한국적인 색깔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작곡한 이 노래는 가요판이 너무도 서양적으로 흐르는 것이 안타까워 만들어 본 국악 가요였다. 미련 없이 유학 길에 오른 그녀는 미네소타 주립대학원에서 작곡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 귀국 이후 한양대, 추계예술대, 국민대 등 대학 강단에서 강의와 현대 음악 창작 활동을 병행해 오며 현재 여성작곡가협회 부회장을 맡는 등 왕성한 사회 활동까지 펼치고 있다. 또한 김민기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배우 오디션과 시사회 모니터링 등에서는 자문 위원으로 참여, 대중 음악과의 인연을 이어 가고 있다.

그녀는 34년 만에 처음으로 정식 포크 공연 무대에 초청 받았다. 바로 명동 서울YWCA 청개구리 송년 콘서트. '얼굴'의 윤연선, 현경과 영애의 박영애 등 전설적인 70년대 여대생 포크 가수들과 함께 무대를 꾸며 주목을 받았다. 현대 음악 작곡가인 그녀가 대중 음악인 포크 공연 무대에 설 결심을 하게 된 것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신의 음악을 사랑해주고 연구까지 하는 포크 팬들의 정성 때문.

미디어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인기 포크가수도 아닌 자신을 기억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보답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 "뭣보다, 이렇게 대접을 받아도 되는지 부끄럽습니다. 또 과연 학생들이 제가 대중 음악을 노래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가 걱정도 됩니다.

그래서 무대에 설 결심을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노래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실제로 대학 시절에만 단지 몇 곡의 포크 송을 만들었을 뿐 그녀는 한번도 가수라는 직함으로 활동을 한 적이 없다.

단 한 장의 독집 음반도 없이 온 국민이 사랑하고 생명력을 잃지 않고 기억되는 포크 싱어송라이터는 유래가 없는 일이다. 그녀는 대학 시절의 베일에 가려진 짧은 활동만으로도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곡을 남겼다.

"현 세대가 너무 랩송 같은 10대 위주의 장르로만 주류를 이루는 것이 안타까워요. 시간이 나면 김민기씨와 음악을 같이 했으면 하지만 응해주지 않네요. 또한 좋은 시인이 지은 좋은 노랫말이 있다면 곡을 붙여 봤으면 하는 생각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입력시간 : 2004-01-0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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