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적시는 목소리 '무대위의 마녀'

[추억의 LP 여행] 한영애(上)
영혼을 적시는 목소리 '무대위의 마녀'

한영애는 영혼이 빨려들 듯 묘한 분위기의 카리스마를 풍기는 영혼의 울림을 가진 ‘소리의 마녀'다. 마치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듯 무아지경에 빠져 열창하는 모습은 때론 관능적이고 범접하기 힘든 영적인 이미지까지 내 뿜는다. 결코 인기에만 영합한 활동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색채로 폭 넓은 대중성을 확보한 드문 여가수다.

포크로 시작해, 블루스와 록, 그리고 테크노를 거쳐 최근 트로트에 이르기까지 온갖 장르의 음악을 섭렵했다. 포크 가수 시절엔 ‘한국의 멜라니 사프카'로, 블루스 록 가수로 변신했을 때는 ‘한국의 재니스 조플린'으로 불렸다. 이는 끊임없이 음악적 아이디어를 창출하면서 그 어떤 노래일 지라도 자신만의 분위기로 변색시키는 그녀만의 차별성 때문이다. 한영애는 풍부한 영감 에 끊임없는 노력으로 스스로를 카리스마적인 여성 보컬로 자신을 자리매김 시켰다.

그녀는 음악하고는 무관한 평범한 가정의 2남 2녀 중 둘째로 서울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막연하게 장래 희망으로 의사를 생각했지만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 숫기 없는 보통 아이'였다. ‘왜 아이들이 나를 지휘자로 뽑았는지 모르겠다'고 겸손해 했지만 그녀는 을로초등학교 시절, 교내 합창경연대회 마다 지휘자로 뽑혀 친구들의 합창지도를 했고 국군장병아저씨 위문공연 때도 대표로 노래를 했을만큼 잠재적 음악성이 풍부했던 학생이었다. 서울여중에 입학해서도 튀는 학생은 아니었다.

이 시절, 마음 깊숙한 곳에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무엇을 찾고 갈구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꿈의 형태는 아니었다. 서울여고에 진학해서 비틀즈 음악을 간간이 들었던 언니와 집에 있던 라디오를 통해 대중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어느 날 언니의 제안으로 저금통을 털어서 싸구려 기타를 구입했다. 아버지의 친구 동생에게 클래식 기타를 몇 번 배웠지만 결국 독학으로 기타를 익혔다.

여고 졸업 후 대학입시에 낙방한 그녀는 재수를 했다. 당시는 음반을 틀어주는 음악 감상실 전성 시대. 떼거리로 몰려다니기보다는 혼자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한영애는 주로 신촌 쪽에서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지냈다. “좋은 팝 음악을 들으려고 희귀한 판들이 많은 신촌 쪽으로 다녔어요." 음악을 좋아했던 남자 친구의 소개로 선배가 운영하는 신촌의 한 카페에 자주 놀러 가 음악을 틀고 손님이 없으면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목표 의식도 없이 그냥 노래가 좋아서 몇 달 동안 그렇게 노래를 불렀다. 조금씩 노래 실력이 알려지면서 ‘이상한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여자애가 나왔다'는 소문이 났다. 소문을 들은 한 음악 매니저가 카페에 찾아 왔다.

“그 사람을 따라 뭔지도 모르고 친구와 함께 남대문의 프린스 살롱에 가서 오디션 같은 걸 보았어요. 그랬더니 내일부터 당장 나오라고 하더군요." 가수에 뜻이 없어 망설이던 그녀는 남자 친구의 설득으로 업소 무대에 올라 두 달여 정도 노래를 불렀다. 당시 레퍼토리는 김민기, 양희은, 멜라니 사프카 등 포크송 계열의 노래들. 사교적이질 못해 동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노래 부르는 자체만을 즐겼다. 어느 날, 함께 출연하던 개그맨 전유성이 드라마센터에서 여는 자신의 개그 쇼의 포스터를 가져왔다. 허락도 없이 게스트로 이름을 올려 거절도 못하고 노래를 했다. 그 후 구자형, 자룡 형제가 주도했던 ‘참새를 태운 잠수함'에서도 노래를 청해왔다. 당시 프린스는 신인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몇 만원의 월급을 이례적으로 받았다. “'처음 무대에 선 신인으로 월급을 받은 건 네가 첨이다'고 하더군요. 모든 사람이 그때 내가 가수가 되려 한다고 생각했었나 봐요"

명동에서 ‘Time In A Bottle'등 팝송을 노래를 하고 있을 때 이정선과 정성조가 찾아왔다. 이정선은 무뚝뚝하게 노래 평을 해 어린 맘에 기분이 상했다. “이정선씨는 나름대로 노래를 가르쳐주고 싶어서 그랬나 봐요." 오비스 캐빈 앞의 로즈가든은 당시 모든 통기타 가수들에겐 최고의 무대. “재수할 때 아는 카페에서 심심풀이로 노래한 게 전부예요. 혼자 있다가 해바라기에 합류했어요. 그때도 가수를 할 마음은 전혀 없었고 그러다가 연극 쪽으로 갔어요" 명동 카톨릭 여학생회관의 해바라기홀에서 김의철을 통해 버피 세인트 메리라는 인디언 여자 가수의 노래를 접하게 되면서 감명을 받았다.

“자연을 사랑했던 그 여자가 굉장히 크게 보였고 멋있는 여자구나, 나도 저렇게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죠" 당시 그녀는 C.C.R,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레드 제플린 등 록 음악을 즐겨 들었고 밥 딜런, 김민기의 통기타 음악은 그들의 아름다운 가사를 좋아 했다. 75년부터 나가기 시작한 해바라기홀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열린 발표회 때 김의철의 노래를 주로 연습해서 불렀다. 그때의 노래들은 이정선 작편곡집인 77년의 비공식 1집<어젯밤 꿈/사랑의 바람.지구,1977>에 녹음 수록되었다. 수록곡은 김의철곡 ‘행복을 파세요', ‘촛불을 켜세요', ‘영원한 사랑', ‘어젯밤 꿈' 등. 1집(비공식)을 내고 TBC등 방송 공개 방송에 나가 몇 번 노래했지만 이 음반은 상업적이지 못하는 이유로 정식발매는 되지 못하고 묻혀버려 전설이 된 음반이다. 그러나 이정선이 그렸다는 수채화 재킷은 환상적이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1-09 17:36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