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인간이 늑대다

[영화되돌리기] 28일 후
인간에게는 인간이 늑대다

별자리를 기준으로 달의 공전 주기는 27.3일, 대략 28일이다. 근데 숫자 28은 1,2,4,7,14의 약수로 이루어져있고, 이 약수를 더하면 재미있게도 28이라는 수가 나온다. 대개 이런 수를 완전수라고 부르는데 성서에서는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하는 데 6일이 걸렸고, 달의 주기가 28일이라는 이유로 완전수 가운데 하나인 6과 28을 신성시 한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서양의 12황도와 같이 적도부근에 28개의 별자리를 만들어 28수(二十八宿)라고 부르며 28을 우주의 수로 여겼다. 이렇듯 28이라는 수는 천문학적으로, 수학적으로, 종교적으로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데니 보일 감독의 영화 <28일 후(28 days later)>는 28일 만에 영국이 완전히 디스토피아로 변하는 악몽과 같은 일을 그리고 있다. 왜 하필 28일인가? 달이 완전히 자기 모습으로 돌아오는 숫자이면서 부분의 합이 전체와 완전하게 일치하는 숫자 28은 영화 속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영원히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암흑의 시간을 의미한다. 28일 만에 완전히 딴 세상이 되어버린 영국. 인간의 이성과 문명의 질서가 종적을 감춘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영화는 영국의 한 영장류 연구소에 들이닥친 동물권리 운동가들이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침팬지를 풀어주면서 시작된다. 물론 여기서 분노바이러스의 실체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바이러스가 혈액을 통해 전염되고 감염된 사람은 20초 안에 분노가 폭발해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 미친 듯이 사람들을 공격하는 증상을 보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언뜻 보면 온 몸에서 출혈이 일어나는 치사율 90%의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자를 연상시키지만 엄청난 완력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감염자의 광기만 남은 모습은 실상 좀비에 더욱 가깝다.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들이 잿빛 시체처럼 배회하는 영국. 황량하고 섬뜩한 이 도시에 28일 전 교통사고를 당한 후 의식을 되찾은 주인공 짐이 등장한다. 마치 영화 <레지던트 이블>에서 마지막 생존자 밀라 요보비치가 창백한 묘석처럼 적막한 도시에 홀로 등장하듯이. 낯선 도시에 어리둥절해하는 짐은 바이러스 감염자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고 또 다른 비감염자 마크와 셀레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들에게 28일 동안 도시에서 벌어진 지옥 같은 이야기를 전해들은 짐. 여전히 인간에 대한 연민이 남아있는 짐과 달리 삶과 죽음 앞에서 잔인해질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셀레나는 일말의 동요없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동료 마크를 죽이게 된다. 결국 둘만 남게 된 짐과 셀레나는 또 다른 생존자 프랭크와 해나 부녀를 만나 안전한 은신처를 향해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그 곳에는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들보다 더 잔인해져 있는 인간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인간은 분노 바이러스 감염여부와 상관없이 잔인한 동물이라는 간단하고 단순한 진리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인간은 분노 바이러스 보균자란 얘기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스토리는 지극히 단조롭고 심심할 만큼 예측가능하다. 간혹 스릴러 영화의 주인공들이 자주 범하는, 스스로를 자의적으로 위험에 빠뜨리는 멍청하게 대담한 끌리세들도 눈에 거슬리고, 분노 바이러스 감염자들이 그들끼리는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 기이한 설정도 의아하다. 하지만 영화는 좀비들의 절규가 젖어든 런던의 서늘한 기운과 문명의 퇴색한 잔해가 전해주는 고적한 느낌만큼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건조하고 거친 화면에 금속성의 음악, 냉소적인 시선, 그리고 도전적인 카메라 움직임. 이 색다른 좀비영화는 스타일의 승리가 스토리의 부실을 만회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3-11 22:15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