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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 여행] 나훈아(下)
포크에서 팝까지 '만능 노래꾼', 한 시대 '화끈하게' 풍미





TBC-TV의 간판 쇼프로그램 <쇼쇼쇼>는 느닷없이 남진-펄시스터즈와의 조인트 리사이틀을 방송했다. 당시 TV쇼로는 드문 인천 해변에서의 야외 촬영이었다. TBC가 남진을 집중 지원하자 MBC는 나훈아 쪽으로 돌아서 가요계가 양분되는 부작용도 생겨났다. 남진은 3월에 나훈아와 똑같은 장소인 시민회관에서 <72 남진 리사이틀>도 개최했다. 하지만 결과는 5만명 대 3만명으로 나훈아의 완승이었다. 두 사람의 대결로 장안이 후끈 달아오르자 언론들은 두 가수의 신체 조건에서 스캔들까지 시시콜콜 들춰내 비교하면서 라이벌 전을 부추겼다. 타고난 음악성을 지닌 나훈아는 노래만 부르는 단순한 가수는 아니었다. 기타와 피아노를 연주하고 곡도 창작했다.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 '풋사랑'의 주제가를 비롯해, 히트곡인 이영숙의 '슬픈 사연', 강소희의 '그날밤' 등도 그의 창작곡이었다. 1971년엔 창작곡 '사랑은 장난이 아닙니다'를 조미미와 혼성 듀엣으로 불러 화제가 되었다. 72년 4월, 지구로 전속을 옮겨 박춘석사단에 합류, 첫 음반 '물레방아 도는데'를 발표했다. 또한 본지(주간한국) 주최로 명동 오비스 캐빈에서 열렸던 성점감상실 프로에 출연, 트로트 외에 포크송과 팝송까지 멋들어지게 불러 만능 가수로서의 능력을 뽐냈다.

72년 6월 시민회관 '쇼 스타 페스티발' 이틀째 공연 날. 마지막 순서로 등장했던 나훈아는 앵콜곡으로 '찻집의 고독'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남진의 사주를 받았다”고 횡설수설했던 김웅철이 깨진 사이다 병을 휘둘러 왼쪽 뺨을 70바늘이나 꿰매는 참변을 당했다. 무대에서 가수가 피습 당한 사건은 사상 최초였다. 구설수는 이어졌다. '숨겨 놓은 동거녀가 있다'는 스캔들까지 터지는 바람에 은퇴 소문이 나돌 정도로 휘청거렸다. 72년 8월의 신보 '고향역'은 반전의 신호탄. '머나먼 고향'이후 소위 나훈아의 '고향시리즈'의 하나인 이 노래는 정상으로 재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트로트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가수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준 첫 자작 곡 집 <해풍/그리움-지구72년8월>도 발표했다. 그 결과 72년 동양방송이 주최한 ‘방송가요대상’의 최우수남자가수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72년 12월 MBC10대 가수상 시상식. 남진과 가수왕 쟁탈전을 벌이던 나훈아는 대세가 기울자 명예 대위가 되어 파월 장병위문을 떠나 버렸다. 이에 발끈한 MBC는 방송금지처분을 내렸다. 당시 그의 매니저 강창호가 "''가수왕'을 주면 귀국시켜 출연시키겠다"는 조건을 내걸어 흥정을 했다는 이유였다. 파문이 커지자 나훈아는 귀국 후 MBC에 사과를 하고 “ 배우 고은아의 4촌인 이숙희와 3월 결혼과 더불어 년말에 은퇴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에 연예단장협회는 나훈아의 무대출연금지조치를 풀고 73년 3월 방송금지에서도 해제되며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결혼일자를 계속 미루고 지구레코드와 전속 연장계약을 맺으며 사실상 은퇴까지 번복하자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극비리에 공군에 자원입대 해, 큰 물의를 빚었다.

76년 7월 제대를 몇 개월 전 이혼을 한 나훈아는 2중 3중 전속계약으로 곤혹을 치러야만 했다. 이유가 있었다. 제대 후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11살 연상인 배우 김지미와 전격 결혼하겠다며 선언을 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것이 그것. 두 사람은 71년부터 사귀어 왔던 사이. 세간은 그간의 모든 일이 김지미와의 관계를 숨기기 위한 것으로 밝혀지자 더욱 충격을 받았다. 나훈아는 모든 가수 활동을 중단하며 한동안 가요계를 떠났다. 79년 1월, 7년 만에 MBC TV '토요일 토요일 밤에'프로에 출연한 것을 기화로 김지미와는 결별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81년 10월 그 동안 갖고 있던 대전 홍진건설사장과 백제로터리 회장직을 버리고 태양레코드와 2억 원에 계약을 맺고 가요계 복귀를 선언했다.

1983년 재기 후 4집 '하얀 새'는 전례없이 팝 적인 분위기를 도입, ‘나훈아 혁명’으로 불린 음반이다. 가수 복귀를 반대해 왔던 김지미와는 결국 82년 6월 결별을 했다. 나훈아는 신보 '울긴 왜 울어'를 발표하고 영화 ‘외로운 사냥꾼’에도 출연했다. 이후 영화 제작 실패, 경영하던 업소의 사고로 흔들거렸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84년, 일본 데이찌구 뮬湄恙?전속 계약을 맺고 일본으로 진출했다. 일본의 주부들이 자발적으로 후원회를 결성하고 87년에는 동경에서는 '나훈아 노래 전국노래자랑'이 열리는 등 반응이 좋았다. 일본의 언론들은 “일본의 엔카 가수를 위협할 한국의 대표 가수”'로 그를 평가했다. 인기를 회복한 그는 85년 12월 4년 간 동거해 오던 14년 연하의 후배가수 정수경과 도옘병玲【?정식 결혼식을 하며 생활의 안정도 찾았다. 또한 자신의 음반사 '아라기획'을 설립해 '님'을 발표했다.

92년. SBS TV에서는 '나훈아 모창대회'가 열려 화제가 되었다. 또한 울산MBC가 주최하는 ‘제 5회 고복수 가요제’에서는 대상을 수상한 데 이어, 94년에는 통산 2,000곡 취입 기념음반 '어매'를 발표했다. 96년엔 3회 대한민국연예술상 특별상을 수상하고 세기가 저물어 가는 99년 12월 30일에는 KBS 라디오의 '노유정의 트로트쇼'에서 벌인 여론 조사에서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남자 트로트 가수로 선정되었다.

악상 설명만 듣고도 곡을 소화하는 타고난 노래꾼 나훈아. 순탄치 않았던 개인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는 1970년대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했던 수많은 청춘들에게 향수를 달래주었다. 남진과의 필생의 대결 승부는 이미 오래 전에 승부가 결정된 듯 하다. 그는 지금까지도 40~50대 중년 여성들의 최고 슈퍼스타로 군림하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 2004-03-2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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