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질은 죽이고 기는 살려라"

[영화 되돌리기] 성질 죽이기
"성질은 죽이고 기는 살려라"

중세의학에 따르면 노란 담즙이 많은 사람이 화를 잘 내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화를 심하게 내는 사람들의 경우 ‘담즙이 피부로 넘쳐난다’는 황달 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담즙이 장을 통해 배출되지 못하고 핏속으로 들어가 얼굴이 노랗게 변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혈관 속에 혈류량이 많은 사람은 다혈질이라 하고, 검은 담즙이 많은 경우에는 우울질이라고 한다. (멜랑꼴리ㆍMelancholie)는 검정을 뜻하는 melas와 노랑을 뜻하는 chloe이 합쳐진 말이고 다혈질은 Sanguine이라 하는데 이는 ‘피’를 뜻하는 라틴어 sangius에서 나왔다.)

그런데 성마르거나 멜랑꼴리한 인간들은 조직 사회 내에서 그리 유쾌하지 않은 존재이다. 다혈질 인간은 쉽사리 흥분해서 사회의 기본을 무너뜨리기 일쑤고 우울한 인간은 매사에 의욕이 없고 소심해서 과감하게 도전해야 하는 일에 흔쾌히 나서지 않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사회는 개개인에게 성질을 죽이라고 종용하면서도 기는 살려야 한다고 설교한다. 이런 모순적인 부탁을 하는 영화가 바로 <성질 죽이기(Anger management)>이다.

영화 <성질 죽이기>는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해 사고를 친 것으로 오해를 받는 소심한 남자에게 미국의 주법원이 ‘성질 죽이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판결을 내리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성질을 죽이는 영화는 아니다. 정확히 하자면 주인공의 기를 살리기 위해 되려 그의 성질을 돋우는 이야기이다. 매사에 자신감이 없는 주인공 버즈닉은 남들 앞에서 여자 친구와 키스도 못할 만큼 소극적인 남자이다. 그런 남자 친구가 내심 불만인 린다. 그녀는 심리치료사 버디에게 부탁해 남자친구 기 살리기 계획을 짠다. 여자 친구의 꿍꿍이도 모르고 출장을 위해 비행기를 탄 버즈닉은 이상하게 시비를 거는 사람들 때문에 난동꾼으로 오해받고 결국 주법원에 의해 버디 박사가 운영하는 ‘성질 죽이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이 때부터 버디 박사는 언제나 기가 죽어, 제 할말도 다 하지 못하는 버즈닉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버즈닉이 적절한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기를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된다.

이 영화에는 성질을 죽여야만 하는 다혈질의 인간들과 어느 정도는 성질을 부려야만 할 것 같은 소심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쓸데없는 성질은 죽이고 기는 살려라” 라고. 이는 한 마디로 ‘결코 사회에 반항은 하지 말되 모험은 감행하라’, ‘체제전복은 안되나 체제혁신은 해라’와 같이 자기본위적인 고난위도의 수사법이다. 또한 성질을 돋우는 부당한 사회에 대해서 침묵하고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영화 속에서 성질을 죽여야 하는 참가자로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 성적 소수자이거나 이민자, 성도착자들로서 사회에서 부당한 편견과 대우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기를 살려야 하는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능력있고 남성적으로 매력이 있으나 스스로 이를 적극적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회에 위협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용기는 적극적으로 북돋아주고 사회에 불한당으로 낙인찍힌 인간들의 성질은 필사적으로 죽여야만 하는 것. 이것이 코미디의 탈을 쓰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 영화의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 쓸데없이 사소한 일에 열받아 무고한 사회에 선량한 시민들에게 화풀이하는 자들의 성질은 제어해야 하겠지만 간혹 정당하게 성질을 부리는 것까지 못 참아낼 만큼 우리사회가 경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4-01 13:44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