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리, 장은아, 장재남 서로 다른 음악색깔, 인생행로

[추억의 LP 여행] 3남매 가수(下)
장미리, 장은아, 장재남 서로 다른 음악색깔, 인생행로

3남매 중 두 번째로 정식 가수에 입문을 한 것은 장은아였다. 그녀는 을지초등학교 4학년 때 높은 경쟁률을 뚫고 염광 어린이 합창단원으로 뽑혔던 재주꾼이었다. 학예회와 소풍 때는 단골로 불려 나가 노래 불러야 했을 만큼 학교에서는 유명했다. 한양여중에 진학하면서 절친했던 언니 장미리를 따라 방송국에 따라 다녔다. 사춘기 시절, 언니의 구두, 옷에 대해 참견을 하며 예쁜 옷은 몰래 입곤 했다. 장은아는 언니의 노래보다 양희은과 방의경 등의 포크송이 좋았다. 언니와 함께 방의경의 집으로 찾아 갔을 정도다. 이후 라디오 음악 프로를 통해 팝송과 포크송을 많이 들었다. 서문여고 3학년 때부터 독학으로 기타 교본을 보며 오빠의 통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언니의 영향으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지만 취미 삼아 노래를 했을 뿐 가수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여고를 졸업하고 명동 오라오라에서 노래를 했던 중학교 동창 박효근을 따라 놀러 갔다. 친구가 그곳의 연예부장에게 “인기가수 장미리의 동생”이라고 소개를 해 얼떨결에 무대에 올랐다. 이때가 76년 후반. 무대에 있던 통기타를 들고 양희은의 '내 님의 사랑은'과 오세은의 '고아'를 불렀다. 깜짝 놀란 연예부장이 “노래를 하라”고 제의했지만 가수가 될 생각이 없어 거절을 했다. 하지만 집요하게 집에까지 계속 찾아오자 어렵게 결심을 했다. 30분 타임을 배정 받아 사람이 없는 초저녁 무대에 올라 주로 외국 팝송과 포크송을 불렀다. 우연하게 가수 생활을 시작한 장은아는 노래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당시 오라오라에는 고 김정호도 출연을 했다. 사회를 맡았던 허참의 소개로 77년, 김만수가 사회를 본 TBC 라디오 생방송프로 '노래하는 곳에'에도 출연했다. 첫 방송이 나가자 맑은 목소리 때문에 CM송 제의가 많이 들어왔다. TBC PD출신 이수담의 CM송 사무실에서 곡을 받기 위해 고 김정호를 만났다. 작사가 박건호는 김정호를 통해 만난 신인 장은아를 픽업했다. 당시 김정호로부터 2곡을 받았지만 자신과 맞지 않아 취입은 못한 장은아는 77년 후반, 계동균과 오동식의 곡을 받아 78년 2월, 데뷔 음반 '잊어버리자/지구,1978'를 발표했다.

군에서 제대를 한 장재남은 78년 부산 '미리내'에서 언더 가수로 노래를 했다. 데뷔 음반을 준비중이던 장은아는 박건호를 부산으로 초청해 오빠를 소개시켰다. 송창식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 박건호는 최종혁에게 의뢰해 장재남의 데뷔 음반제작을 장은아와 동시에 착수했다. 먼저 발표된 장은아의 데뷔 음반은 흥행이 되질 않아 곧 바로 절판이 되고, 2달만에 오동식 곡 '고귀한 선물'을 타이틀로 2집을 내 좋은 반응을 얻었다. 3집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1979년'는 연속 히트를 터트리며 인기가수로 떠오르게 했다. 3남매 중 가장 늦게 솔로 가수로 데뷔한 장재남. 데뷔 곡인 대화 형식의 독특한 노래 '빈 의자'를 포함, 경쾌한 컨튜리풍의 '사람을 찾습니다', '항아리'의 반응은 대단했다. 동시에 두 남매가 히트 퍼레이드를 벌이자 은퇴한 장미리까지 거론되며 각 언론들은 '한국 최초의 삼남매 히트 가수 탄생'이라며 집중 조명했다. 이때부터 삼남매는 ‘ 열린음악회’, ‘ 토요일 토요일 밤에’, ‘ 쇼2000’ 등 TV무대에 함께 올랐다. 동생들을 위해 모습을 드러낸 장미리는 강력한 활동 재개 요청을 받았다. 팀 결성 분위기가 무르익었지만 장미리의 제한된 활동과 판이한 음악 색깔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장재남은 데뷔 음반 이후 자신의 음악 방향과 폭을 넓히기 위해 2년 간 칩거했다. 81년 9월, 슬로우 풍의 애절한 신곡 '멀어진 사람'과 고고 풍의 '동대문' 등을 발표하면서 YMCA 대강당에서 '신곡 발표회' 콘서트를 개최했다. '동대문'은 옛 것과 오늘을 보면서 미래를 생각한다는 젊은 의식이 담긴 야심작이었다. 당시 게스트는 장은아, 유심초, 김학래 등. 이후 장은아는 81년 KBS 2FM '젊은이의 노래'에서 임백천과 함께 DJ를 맡아 8개월여 진행했다. 이후 오빠와 같은 서라벌로 전속사를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아 신인 작곡가 이범희가 지은 디스코 풍의 신곡 '작은 나비'를 발표했다. 이후 81년 12월 KBS 라디오 PD 김종건과 세실극장에서 결혼을 했다. 장재남 역시 82년 3월 함세웅 신부의 주례로 82년 4월 결혼을 했다. 10개월만에 재기를 한 장은아는 조동진 곡 '오늘 밤 내게'를 발표해 변화된 음악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이후 83년 '꿈꾸는 인형'등 음반을 몇 차례 발표했지만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는 않았다.

93년 초반, 장은아는 기획사 화인픽스를 창립, 록 그룹 '점프' 등 몇몇 음반을 제작償嗤?실패했다. 이후 한동안 가정에만 전념하다 98년, 포크 바람을 타고 미사리 무대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작년엔 어린이대공원에서 양희은, 박경애 등 10명의 여성 포크 가수들과 조인트 공연을 열었다. 장은아는 방송 활동보다는 소극장 위주로 성숙된 음악적 분위기에서 노래를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예전의 히트곡을 포크적으로 편곡하고 3곡 정도 신곡을 준비해 신보를 발표할 마음을 품고 있다. 한편 재작년까지 경기도 안양 근방에서 라이브 카페를 운영했던 장재남은 지금도 라이브 무대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장미리는 논현동에서 딸 둘을 낳은 평범한 가정 주부로만 살아가고 있다.

처음부터 서로 다른 음악 항해를 해 오고 있는 3남매. 음악 색깔이 달라 팀 결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각자가 남긴 히트 넘버들은 지금도 대중의 애창곡으로 사랑 받고 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4-22 15:59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