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을 노래한 국민가수, '서울 광상곡'에 장안이 발칵

[추억의 LP 여행] 김정구(上)
희로애락을 노래한 국민가수, '서울 광상곡'에 장안이 발칵

일제 강점기 하인 1930~40년대에 춤과 코믹한 몸 동작을 곁들인 김정구의 노래와 무대는 파격이었다. 대부분 가수들이 어두운 노래만을 불렀던 당시, 여자도 아닌

남자 가수가 코믹한 대화식 노래(만담)에 춤까지 춘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던 시기였다. 그만큼 ‘ 왕서방 연서', ‘ 앵화폭풍' 등 김정구의 풍자적인 노래는 재미있었고 흥겨웠다. 오락만이 아닌 민족 애환을 담은 ‘ 눈물 젖은 두만강', ‘ 눈물의 국경' 등 서정가요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희노애락을 4색으로 표현하는 탁월한 노래와 모범적인 생활 덕에 그는 국민 가수 1호로 공인됐다.

그는 조그만 철공소를 운영했던 부친 김원길과 찬송가 솜씨가 특출했던 모친 김자혜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함경남도 원산시 상동에서 1916년 7월 15일 태어났다. 재담에 능했던 부친의 재질과 어머니의 노래 솜씨를 함께 이어 받았다. 동방예술단에서 바이올린과 트럼펫을 연주했던 형은 작사, 작곡, 연주, 노래 실력을 겸비, 국내 최초의 싱어 송라이터로 불릴만한 선구자였다. 형의 아내 정재덕도 30년대 중반까지 ‘ 님이여' 등으로 인기를 누렸던 여가수. 누이 김안라는 동경 동양음대에서 유학을 하고 1933년부터 ‘ 이별의 포구', ‘ 달빛 어린 바다' 등 수많은 히트곡을 불렀던 인기 가수였다. 이들 삼남매는 해방 후 김용환이 이끄는 악극단에서 함께 활동을 했다. 막내 김정현도 일본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던 재원. 당시 그의 동네에는 신카나리아, 이인근, 테너 이인범, 원산관현악단장 이흥열 등이 살고 있었다.

물을 좋아했던 그는 어린 시절 동네친구들과 함께 송수원 해수욕장이나 명사십리 백사장을 놀이터로 삼고 놀았다. 바닷가의 수많은 추억은 가수로서의 감성을 일깨워주는 고향이 되었다. 작곡자 손목인은 ‘ 바다로 가자' 녹음을 끝낸 그를 끌어 안고 “ 이렇게 좋은 감정으로 노래하는 가수는 처음이다. 너는 감정의 천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년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던 그는 성가대원으로도 활동을 했다. 미국인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던 광명보통학교에 들어갔다. 공부보다는 운동과 찬송가와 그리고 휘파람 잘 부르는 아이로 유명했던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14살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책방 점원 생활을 하며 YMCA에서 운영하는 원산 기독교청년학원을 마쳤다. 소년 시절, 그는 양치기, 물지게꾼, 행상, 신문배달원 등 온갖 일을 하며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도 모자라, 간장을 탄 찬물을 타먹기까지 했다.

그는 ‘ 음악천재'로 불린 엄격한 형에게 회초리를 맞아 가며 음악이론과 바이얼린 주법을 배웠다. 16살 때, 형을 따라 대승관 극장에 가 무성영화 음악을 대타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후 원산 관현악단과 혼성합창단원으로도 활동하며 순수 음악인으로의 꿈을 불태웠다. 17살 때 유학간 누이가 방학을 틈 타 집에 오자 4남매 가족노래 선교단을 구성해 금강산 입구 온정리 교회등 해금강 일대를 순회하며 공연을 했다. 이때 후에 한양대 교수가 된 형 친구인 유학생 김소동이 김정구의 노래 재능을 발견하고 가수로 나설 것을 권유했다. 순수 음악을 꿈꿨기에 망설였지만 형과 누이의 충동으로 상경을 해 충무로에 위치한 신생레코드사 뉴 코리아 에 찾아갔다. 찬송가 ‘ 돌아와 돌아와'와 미국민요 ‘ 메기의 추억'을 불러 오디션을 통과, 전속 1호 가수가 되었다. 찬송가를 불러 대중가수가 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933년 녹음 연습 중에 유랑극단의 상징적 존재인 남봉명의 부름을 받고 파고다 공원 앞 조선극장의 신파 연극 막간무대에 올랐다. 무대복이 없어 학생복을 입고 만요 ‘ 서울 광상곡'을 불렀다. 서양 문화의 무분별한 모방을 풍자한 이 노래는 장내는 발칵 뒤집어 놓으며 무려 다섯 번의 앙코르를 받았다. 신인 가수 김정구는 음반 취입 전에 이미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당대의 최고 여배우 최선과 대화를 주고 받는 만요 ‘ 3번 통 아가씨'를 비롯해 ‘ 어머님의 품으로' 등 2곡을 취입해 데뷔SP음반을 발표했다. 두 곡 모두 친형 김용환의 곡이었다. 노래 가사가 인쇄된 전단지가 뿌려지고 종로와 을지로의 음반 가게에 벽보가 나붙고 유성기판을 통해 그의 노래가 계속해서 흘러 나왔다.

좋은 반응을 얻고 고향 원산으로 내려가 쉬고 있던 중 ok레코드 문예부장 김성흠이 찾아 와 스카우트 제의를 해 다시 상경했다. 그는 제법 유명 가수가 되어 있었다. 월300원의 거금을 벌며 철마다 3벌 이상의 양복을 맞춰 '양복이 제일 많은 장안의 멋쟁이'로 불렸다. OK레코드는 김정구 외에도 장세정, 송달협을 함께 스카웃 했고 서정 가요의 제왕 남인수도 합류했다. 입사동기 장세정의 ‘ 연락선을 떠난다'와 함께 ‘ 항구의 선술집'을 발표했다. 빅 히트가 터졌다. 전국의 주점에선 젓가락을 두드리며 그의 노래 ‘ 부어라 마시어라'를 부르며 목청을 드높이는 청년들이 넘쳐 났다. 일제의 탄압에 입과 귀를 봉쇄 당한 젊은이들의 마음을 담은 ‘ 항구의 선술집'은 가수로의 기반을 다져준 첫 히트곡이었다. 창경원 벚꽃가지마다 김정구의 사진을 주렁주렁 매단 사진을 썼던 신보 '창경원 벚꽃'의 사진 홍보는 큰 화제가 되었다. 1938년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해였다. 2월의 빅히트 곡 '왕서방 연서'는 그 서막이었다. 이가 빠진 중국인 분장을 하고 바보 같은 제스처로 세태를 풍자했던 김정구는 최고 인기 가수로 솟아 올랐다. 대표곡이자 대중음악사상 최고의 명곡으로 손꼽히는 ‘ 눈물젖은 두만강'도 이 때 발표되었다. 12월에 발표한 생동감 넘치는 ‘ 바다의 교향시' 역시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4-28 21:16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