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젖은 두만강에 담은 민족의 애환과 독립의지

[추억의 LP 여행] 김정구(下)
눈물젖은 두만강에 담은 민족의 애환과 독립의지

국민가요 ‘ 눈물젖은 두만강’은 1935년 여름, 악극단 예원좌의 일원으로 두만강 유역의 도문에 공연 갔던 작곡가 이시우가 만들었다. 당시 여관에서 쉬고 있던 이시우는 먼길을 찾아 와 독립군 남편의 전사 소식을 접한 어떤 여인의 통곡에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무심하게 흐르는 두만강의 정경과 여인의 통곡에서 민족의 한을 느낀 그는 멜로디가 떠올랐다. 공연 마지막 날, 소녀 가수 정성월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리고 노래의 사연을 소개하자 공연장은 이내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일생의 역작을 작곡한 이시우는 이 노래를 정식 음반으로 남기고 싶어 인기 가수 김정구를 찾아갔다. 노래가 마음에 들었던 김정구는 작곡가 박시춘을 찾아가 음반 제작 허락을 받아 내고 작곡가 김용호에게 부탁해 1절밖에 없던 노래를 3절까지 완성시켜 취입을 했다. 노래가 발표되자 김정구는 무대에서 이 노래를 꼭 불러야 했을 정도로 반응이 대단했다.

김정구는 최초의 음반사의 전속연주단인 OK 연주단과 함께 전국을 순회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며 OK 악극단은 북경, 상해, 만주, 일본으로까지 활동 반경을 넓히는 한편 이름도 조선악극단으로 변경해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당시 멤버는 작곡과 반주 박시춘ㆍ 손목인ㆍ김해송, 가수 남인수ㆍ고복수ㆍ김정구ㆍ송달협ㆍ이난영ㆍ장세정ㆍ백설희 등 가히 최강의 라인 업이었다. 당시는 남인수와 김정구의 라이벌 시대. 두 사람의 공연 후에는 항상 장안의 기생 인력거가 길게 줄을 섰다. 김정구의 한달 수입은 당시 집 2채에 해당하는 거금 1,000원에 달했다. 그가 출연했던 서울의 명치좌(명동 국립극장 전신)과 부민관(구 국회의사당)은 입장권을 사려는 관객들이 건물 둘레를 뱀이 또아리 틀 듯 휘감았다. 그가 종로거리를 걸으면 거리가 마비되었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달리던 전차가 멈추기까지 했다.

두만강 부근 공연 때, 일본 경찰에 잡혀 남편이 옥사해 소복을 입고 있던 한 여성 관객이 사연과 함께 노래를 듣고는 두만강에 투신 자살을 했다. 이 사연이 알려지며 ‘ 눈물젖은 두만강’은 더욱 널리 불리워졌다. 이에 일제는 ‘ 민족 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라는 멍에를 씌웠다. 평양 금천대좌공연 때는 ‘ 낙화삼천’을 노래하자 조선인 일본 경찰이 “ 노래가 불온하다”며 경찰서로 끌고 가 사흘동안 고문을 했다. 또한 ‘ 타향술집’에선 “ 술잔을 기울이며 외로이 우나니”라는 부분을 두고 “왜 외로이 우느냐?”며 문제 삼기도 했다. 무대 장치 가운데 태극선이라도 그려지면 무조건 문제 삼던 시절이었다. 동경 공연 때는 ‘ 유쾌한 봄소식’에서 “ 긴자의 버들이 넘실넘실”부분의 “ 넘실넘실”을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로 부르자 감격에 겨운 유학생들이 무대위로 올라와 그를 얼싸 안았다. 그 때문에 경찰에 끌려 가 조사를 받았지만 그의 숙소에는 유학생들이 가져 온 꽃다발이 넘쳐났다. 하지만 총독부의 강요에 견디지 못하고 전쟁을 독려하는 영화 ‘ 너와 나’에 백마강의 뱃사공으로 출연해 주제가 ‘ 낙화삼천’을 부르는 수모도 겪었다.

그는 일본 패망 직전인 동경에 볼모로 잡혀있던 조선 영친왕(이은)과 방자여사를 위해 열었던 아카사카 별궁 공연을 가장 잊지 못했다. 1943년, 27살의 청년 김정구는 춘천 처녀 조남진과 결혼을 해 2남 4녀를 두었다. 해방 후에도 영화 ‘ 눈물젖은 두만강’에 출연해 꺼지지 않는 인기를 이어 갔다. 하지만 형 용환과 함께 결성한 태평양가극단의 지방순회공연이 실패해 모든 재산을 날리는 좌절도 겪었다. 정부 수립에 이어 6ㆍ25 전쟁이 터지고 9ㆍ28 수복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그의 집에 날아든 두 발의 포탄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1ㆍ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 풀 빵 장수를 해 연명을 했다.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외국 팝송과 현인, 박재홍 등 후배들에 밀려 입지를 잃어 갔다. 1961년, 한일관계가 새로운 장을 맞기 직전에 재일 동포 위문 공연을 떠나 동경을 비롯해 6개 도시 순회 공연을 열었다.

‘ 눈물젖은 두만강’, ‘ 왕서방 연서’, ‘ 바다의 교향시’ 등 700여 곡을 남긴 그는 1967년 서울시장공로상, 73년 국방부장관상에 이어 1980년 대중가수로서는 최초로 보관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1976년 2월, 퍼시픽호텔 홀리데이인 서울에서 열흘동안 대중가요 사상 최초의 회갑 기념 공연을 열어 주목을 받았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밤무대는 물론 85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서 평양 공연, 87년 미주 해외교포 위문 공연 등에 참여했다. 87년 KBS 가요대상 원로가수상을 수상한 데 이어, 90년 MBC TV ‘ 토요일 토요일은 胄탓?에서는 그의 55년 가요인생에 대해 특집방송을 했다. 하지만 92년 노인성 치매로 “ 이제는 눈물젖은 두만강 가사도 깜빡 깜빡한다”며 요양차 미국으로 건너갔다. 6년 후, 병마를 이겨 내지 못하고 98년 9월 25일 향년 82세로 LA에서 세상을 등졌다. 2000년 8월, 가수분과위는 두만강변에 연변조선족전통문화연구센터를 세우고, 도문성 옛 두만강나루터에는 ‘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비 건립을 추진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개화기부터 60여년 동안 활동을 이어오며 산증인 역할을 했던 국민가수 김정구. 고 현인도 “ 스타 이전에 인간적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셨고 노래에 앞서 항상 바르고 검소한 생활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다”고 생전에 회고했었다. 그의 노래 ‘ 눈물 젖은 두만강’'은 한국 대중 음악사상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곡으로 불멸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5-04 21:12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