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적 목소리의 팔방미인, 대중문화계의 즐거운 이단아

[추억의 LP 여행] 조영남(上)
천부적 목소리의 팔방미인, 대중문화계의 즐거운 이단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늘 파격적인 언행으로 화제를 몰고 다니는 대중문화계의 즐거운 이단아 조영남. 그는 사실 가수 자체만으로는 변변하게 내세울 히트곡이 없는 특이한 존재다. 하지만 금기된 세상의 치부를 공개적인 장소에서 즉흥적으로 내뱉었던 자유분방함과 서울대 성악과 출신의 대중 가수라는 태생적 엘리트 프리미엄은 대중적 관심 대상이 되기에 필요한 충분 조건으로 한 몫 했다. 가수 겸 방송인으로 활동하는 그는 천부적인 목소리와 가창력, 재치 있는 입담에 그림과 글에도 뛰어난 만능 대중예술인이다.

그는 황해도 남천에서 잡화상 계림상회를 운영했던 부친 조승초씨와 주일학교 선생이었던 모친 김혜길씨의 예능과는 거리가 먼 집안의 9자녀 중 일곱째로 1945년 4월 2일 태어났다. 형제 자매 중 4명은 사별을 했다. 친동생 조영수는 부산 음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6.25 전쟁이 터지자 전 가족은 남하했다. 1952년 성북초등학교에 입학을 한 그는 3학년 때 충남 예산의 삽교초등학교로 전학했다. 개구쟁이였던 그는 동네 친구들과 개구리, 메뚜기, 뱀 등을 잡으러 산과 들로 놀러 나가길 좋아 했다. 당시 5일장으로 열렸던 화개장터의 약장수가 들려 준 노래 ‘감격시대'는 어린 마음을 사로잡았다. 음대 지망생이던 형 조영걸의 어깨너머로 배운 라토스카의 ‘ 별이 빛나건만'을 학예회 때 원어로 불러 외국 원조 기관에서 참관 온 외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예산읍 초등학교 미술대회에 출전했다. 1957년, 부친이 고혈압으로 반신불수상태가 되어 집안 사정이 어려워 졌다. 1958년 삽교중학에 입학, 탁구 선수로 활약했지만 궁핍한 집안사정 때문에 서울 누나집에 맡겨졌다.

서울사대부고에 떨어져 2차로 용문고에 들어가 학교 밴드 악장을 맡았다. 이때의 단짝 이영웅은 서울중학 1학년생 이장희의 친형이었다. 동신교회 성가대에서 1년 후배 윤형주를 알게 되었다. 고 2때 한양대 주최 전국 음악 콩쿠르에 출전해 낙방을 했다. 하지만 장래성을 본 김연준 총장이 특별 장학금에 레슨비를 지급해 줘, 화제가 되면서 동아일보의 가십란 휴지통에도 실렸다. 이후 한양대 성악과 교수 조상현을 사사한 그는 이듬해 콩쿠르에서 1등 입상을 해 한양음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 2학년 때, 부잣집 딸이었던 음대 후배 여학생 이영주와 연애를 시작했다. 여학생 집안이 발칵 뒤집어져 학교 사무처에서 제동을 걸고 나오자 학교를 그만 둬 버렸다. 66년 서울음대에 재응시하여 합격했다. 음대 연극반과 오페라반에 가담하면서 오태석, 이건용 등과 교분을 쌓았다. 오태석과 함께 ‘ 우리 읍내', ‘버스 스톱' 등 연극 활동에도 참여했고 교내 오페라에도 출연했다. 또 청년 팝 음악의 산실이던 무교동 경음악감상실 쎄시봉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이백천, 피세영, 송창식, 윤형주, 윤여정, 이장희, 김세환, 장우, 김도향, 박상규, 이상벽 등을 알게 되었다. 이후 각 대학의 축제무대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68년 4월 이백천의 주선으로 TV 아침프로 ‘ 오늘도 명랑하게'에 출연해 외국 팝송을 불렀다. 당시 동신교회 성가대가 비신앙적 생활 태를 이유로 장학금 지급을 중단하자, 오디션을 통과해 미8군 쇼단 아르바이트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펄씨스터즈와 함께 TBC TV 오디션을 봤지만 낙방을 했다. 하지만 장래성을 본 TBC 황정태부장의 스카우트로 ‘ 쇼쇼쇼'에 출연했다. 세계적인 선풍을 몰고있던 톰 존스의 ‘ 딜라일라'를 번안해 노래한 그는 하룻밤사이에 인기가수가 되었다. 지구, 신세기, 미미 등 3개 레코드사에서 음반 제작 제의가 동시에 들어 왔다.

제일 먼저 지구의 전속작곡가 김인배, 뒤를 이어 신세기의 이봉조가 TBC TV의 친분을 내세우며 달려 왔다. 하지만 재미는 DBS의 DJ 최동욱의 ‘ 탑툰 쇼’를 비롯해 해적 팝송 음반을 주로 발매해 오던 미미레코드가 봤다. 미미는 편곡자와 가수의 승낙없이 방송용 테이프를 입수해 불법으로 조영남의 데뷔 음반을 발매해 버렸던 것. 재미있는 것은 해적 음반인 ‘ 탑튠 쇼 37집'에 수록한 ‘ 딜라일라'보다 앞선 36집에 최동욱이 번역한 ‘ 그린 베레의 노래', ‘월남에서 온 편지' 등 2곡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 따라서 조영남의 공식 데뷔 곡은 ‘ 딜라일라'이 아닌 ‘ 그린 베레의 노래'가 된다는 사실이다. 조영남은 “ 골치 아파서 전부 인심 쓰고 나눠줬다"고 회고했다. 뒤늦게 DJ 이종환은 다른 가수에게 ‘ 딜라일라'를 취입시켜 국내는 가히 톰 존스의 ‘ 딜라일라 열풍’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조영남의 등장은 이후 김정우, 이주랑, 화?씨스터즈, 트윈 폴리오 등 신인 팝송 가수의 양산을 불러왔다. 68년 말, 기세를 몰아 서울신문사제정 제1회 한국문화대상 시상식에서 연예 부문 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평론가들로부터 “ 기존 가수들의 창법에서 완전히 탈피한 놀라운 소화력의 가수”라는 극찬을 얻자 이봉조, 홍연걸, 김인배, 손석우, 김기웅, 정민섭, 서영은 등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이 곡 주기 경쟁을 벌였다. 조영남은 내친 김에 대학을 중퇴하고 크라운 승용차를 구입해 명동 신도 호텔에 투숙하며 본격적인 가수 활동에 나섰다. 그는 시청 앞의 봉주르 살롱에서 피아니스트 겸 가수로 일하며 라디오와 TV 방송에 출연했다. 유명해지자 외모가 비슷했던 서양화가 장이석과 부자설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때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은 송창식, 윤형주, 윤여정 그리고 연대 작곡과생 최영희. 영화 ‘ 내 생애 단 한번만’에 출연한 조영남은 최영희와 함께 TV 드라마 ‘ 너무하셨어'와 신중현이 음악감독을 맡은 ‘ 푸른 사과'에 함께 출연해 열애설이 모락모락 피어나기도 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5-13 15:14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