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을 거부한 행복한 아웃사이더

[추억의 LP여행] 조영남(下)
평범함을 거부한 행복한 아웃사이더

젊은층의 폭발적인 인기를 몰고 온 조영남. 1968년 9월, 서울 드라마센터에서 첫 리사이틀 ‘ 팝스 콘서트'를 성황리에 열었다. 극단 산하의 ‘ 고독한 영웅'에 슈베르트 역으로 출연해 가수 배우로도 관심을 끌었다. 인기가 높아지자 납작한 얼굴에 코, 짤막한 키에 더벅머리 외모 때문에 ‘ 타잔'이란 별명을 얻었다. ‘ 서울 클럽'으로 불렸던 조영남, 최영희, 트윈 폴리오는 성가를 포크송으로 편곡해 경동교회에서 음악 예배 형식의 콘서트를 열어 “ 교회에서 쇼를 한다”는 비난과 “ 색다른 시도”라는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1969년 말, TBC의 5회 방송가요대상에서 단짝 최영희와 함께 남녀신인 가수상을 동반 수상했다. 또한 코카콜라 CM송을 번안해 최초의 번안CM송가수가 되었다. 거금 50만원을 받고 출연했던 69년 시민회관 리사이틀. 흥행은 평년작이었지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신중현곡을 대거 부른 실황음반은 수 차례에 걸쳐 재발매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1970년 4월 8일, 서울시에서 건립한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다. 김씨스터즈의 내한공연에 초청된 그는 ‘ 신고산타령'을 와우아파트에 빗대 “ 신고산이 우르르르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라고 즉흥적으로 개사를 해 노래하자 공연장 분위기가 얼어 붙었다. 다음날 새벽 홍성지청으로 연행된 그는 사유서를 낸 후 입대를 해 육군합창단원이 되었다. 군에서도 튀었다. 군 당국이 요청한 ‘ 황성 옛터' 대신 예정에 없던 ‘ 각설이 타령'을 군 행사에서 불렀다. “ 1년에 한 번 육군 행사에 참석하는 박대통령을 지칭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으로 조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군 시절 발표한 ‘ 이일병과 이쁜이’ 음반이 히트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1973년 김장환 목사의 소개로, 내한중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 대집회에서 성가를 불렀다. 제대를 앞두고 윤여정과의 결혼설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해 9월, 전격적으로 MBC 라디오 ‘ 별이 빛나는 밤에' 의 DJ를 맡아 DBS ‘ 0시의 다이얼’ 의 이장희, TBC ‘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서유석, CBS ‘ 꿈과 음악사이'의 임문일과 경쟁을 벌였다. 또한 김민기의 칭찬에 용기를 얻어 인사동 한국화랑에서 첫 개인전도 열었다. 하지만 그 해 겨울, 돌연 미국 하와이로 떠난 그는 LA에서 선교집회를 시작했다. 당시 교회강단에서 성가 대신 ‘ 최진사댁 셋째딸'을 부르는 돌출 행동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75년 2월, 비밀약혼식을 올렸던 탤런트 윤여정과 미국 시카고 제일침례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77년 가을, TBC 주최로 이화여대 강당에서 귀국 공연을 개최했다. 신학에 관심이 지대했던 그는 트리니티 신학대를 79년에 졸업하고, 목사와 대중 가수의 길에서 고심을 했다.

81년, 귀국을 결심한 그는 첫 저서 ‘ 어느 한국 청년이 본 예수’의 발간과 동시에 주간지 선데이 서울에 ‘ 조영남 양심학'을 1년 간 연재해 책으로 출간했다. 또한 82년 대극단의 뮤지컬 ‘ 에비타'에서 체 게바라 역을 맡는 등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83년 김도향과 듀엣으로 발표한 ‘ 꿈의 대화'는 ‘ 한국판 도밍고와 존 덴버’로 주목을 받으며 빅 히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87년 20년 연하의 여대생과의 교제가 아내 윤여정에게 들통나면서 이혼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절치부심, 89년엔 모노드라마 ‘ 의상을 입어라'로 전국 순회를 하고 91년엔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한국가수로는 조용필, 패티김에 이어 3번째로 올랐다. 92년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국내에 정착하면서 KBS에서 생방송 심야토크쇼 ‘ 조영남쇼'의 진행을 맡았다. 또한 수필집 ‘ 넌 노래 부르지마'와 ‘ 삽다리를 아시나요', 그리고 ‘ 조아저씨 이야기'등의 집필ㆍ발간 활동도 이어갔다. 94년 5월, 그의 노래 ' 내 고향 삽다리를 아시나요'의 노래비가 삽교중고등학교 정문 앞에 세워졌다.

10년 간 동거를 해온 백은실과 95년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퍼포먼스 같은 결혼식을 올린 후 헤어졌다. 이후 성악가인 친동생 조영수와 라이브 듀오음반, 97년엔 패티 김과 듀엣음반 ‘ 우리 사랑', 98년엔 신보 ‘ 시작' 등을 발표하며 꾸준히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또 ‘ 생방송 행복 찾기’, ‘ 체험 삶의 현장’, ‘인물탐구 ‘ 조영남이 만난 사람' 등을 진행하며 전문 방邦括막?거듭났다. 2002년 5월, MBC ‘ 임성훈쇼'에서 “ 결혼할 상대가 있다”고 농담 삼아 말했다가 세 번째 결혼설이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구설수에 휘말려 곤혹을 치렀다. 어느 날, 열린 음악회 500회 특집 방송등 공사석에서 정장 차림에 검은색 힐리스(바퀴 달린 신발)를 신고 나타나기도 했다. 2002년 9월, 평양 ‘ 류경 정주영체육관 개관秀?통일음악회’에서 힐리스를 신고 북한의 인기가요 ‘ 심장에 남는 사람'을 멋지게 부르며 무대를 누빈 조영남은 1만2,000여명의 북녘 관객들을 뒤집어 놓았다.

그는 1백여장의 음반을 통해 ‘ 화개 장터'등 자신의 노래도 많이 불렀건만 연말 10대 가수에는 한 번도 뽑힌 적이 없다. 그래서 ‘ 자기 노래가 없는 가수'라는 불명예를 지고 다닌다. 그가 3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대중의 관심 대상이 되었던 것은 섬세한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 정열적인 무대 매너를 지닌 가수라는 점 외에도 예측 불가능한 돌발적 언행과 기행과 더불어 화가, 전도사, 수필가, 방송 MC 등 만능 엔터테이너 활동이 한몫을 했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과 기질 그리고 재능 때문에 도리어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는 데 저해가 됐다는 아쉬움도 있다. 국민가수급으로 느껴질 정도로 다재다능한 그가 음악적으로는 왠지 아웃사이더로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5-20 15:04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