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그러나 나른한

[영화되돌리기] 잔다라
충격적인, 그러나 나른한

영국의 미술학자 케네스 클라크는 ‘누드’(Nude)와 ‘네이키드’(Nakded)의 차이는 옷을 벗었다는 것에 대한 자의식의 유무라고 말했다. 그의 기준에 따른다면 말끔하게 차려 입은 두 남자 사이에서 침착하고 정숙한 자태로 벌거벗은 채 앉아 있는 여인이 등장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식 식사’는 누드화고, 벌거벗은 모습을 들키고 부끄러워하는 여인이 등장하는 ‘수산나와 장로들’(루벤스 작)은 네이키드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섹슈얼리티를 담아낸 수많은 미술 작품들이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관능미 뿐만 아니라 에로틱한 상상, 신체의 변형이나 왜곡을 통한 변태적 성애를 대담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어 사실상 예술에 있어서 누드와 네이키드의 구별은 상당히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영화에서도 이 둘의 구분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일반 정서에 배치되는 과격하고 비정상적인 성행위가 묘사될 때는 포르노라는 불쾌한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변태적 행위, 그 자체만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포르노와 원시의 성을 탐닉하되 성애의 쾌락에만 함몰되지 않고 예술을 지향하는 그 무엇은 구별된다는 사실이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성을 소재로 한 영화 ‘잔다라’에서 그 아슬아슬 미묘한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영화 ‘잔다라’는 강간을 당한 여자에게서 태어난 주인공 잔다라가 성에 눈 뜨고 한 명의 남성으로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자신의 핏줄이 아니라는 이유로 잔다라를 학대하는 아버지 쿤룽은 아내를 잃은 후 무절제한 성애에 빠져든다. 시도 때도 없이 신음소리를 내?b는 아버지의 과도한 육욕을 지켜보며 자란 잔다라는 점점 육신의 삶이 지닌 방종과 쾌락에 눈을 떠간다. 집 안에서 유일하게 잔다라를 사랑해주던 그의 이모 와드가 쿤룽의 아이를 낳자 잔다라는 더욱 외톨이가 되고, 그 무렵 후처로 들어온 쿤룽의 옛 애인 분령은 잔다라에게 거칠 것 없는 성적 환타지를 심어준다.

아버지와 이복동생으로부터 멸시를 받아 온 잔다라는 분령이 열어주는 은밀한 성의 세계에 깊숙하고 격렬하게 빠져들게 되는데, 어느 덧 무의미한 섹스에 몰두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그토록 증오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반복적인 정사장면 외에도 강간, 근친상간, 동성애 등 묘사하기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성적 표현과 암시들이 등장한다. 할렘을 연상케 하는 쿤룽의 집은 그야말로 성적 욕망의 위험한 나락을 보여주는 일탈의 공간이다. 하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에로티시즘이란 것이 원래 그다지 단정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성적으로 미성숙한 신체를 향한 에로틱한 상상, 동성간의 성애, 은밀한 곳을 엿보는 관음증과 같이 에로티시즘을 구성하는 보편적인 요소들은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한 비밀스런 욕정이다. 들춰지는 순간 때론 섬뜩하고 때론 통쾌한 공공연한 비밀이다.

영화는 이 어마어마한 비밀을 발설하는 듯하지만, 결코 노골적으로 까발리지 않는다. 여인의 음부를 살며시 가린 베일처럼 퇴폐적인 육욕을 흐릿하게 만드는 아열대의 뜨거운 증기처럼 영화는 그렇게 은근한 장막을 치고 있다.

야한 영화를 원한 사람에게 이 은근한 장막이 상당히 거슬릴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대체적으로 흐릿한 장막 너머의 황홀경을 머리 속으로 그려낼 수 있는 에로틱한 상상력의 소유자나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와 그녀의 은밀한 세계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은근과 끈기가 있는 자들에게 권할 만 하다. 놀랄 만큼 충격적인 소재를 담고 있으면서도 나른한 아열대의 오후처럼 지루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영화 잔다라. 적어도 포르노그라피에 빠지지 않고 에로티시즘을 이뤄냈으니 비디오 가게에서 영화를 고르는 손길만큼은 민망하지 않을 것이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5-20 15:06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