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로 화려한 비상대중음악의 격 높인 음악성

[추억의 LP 여행] 조동진(下)
<행복한 사람>으로 화려한 비상
대중음악의 격 높인 음악성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음악 친구들이 다 사라져 버리자, 제대 후 작곡에만 전념하며 칩거했다. 가정을 꾸린 그는 별다른 직업 없이 자기 탐구의 시간으로만 일관했기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대한극장 앞의 강 프로덕션의 강근식을 도와 CM송 작곡에 손을 댔다. " CM송을 많이 만들었는데 슬프다는 이유로 채택된 적은 없습니다." 이때 나중에 들국화의 멤버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전인권, 최성원 등을 알게 되었다.

데뷔 음반 녹음은 경제적인 이유로 시작했다. 록 그룹 ' 동방의 빛' 멤버들과 함께 이촌동 서울 스튜디오와 역촌동 오리엔트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다. 음악을 시작한지 12년만인 1978년의 일이다. 데뷔 앨범은 본의 아니게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쳤던지라 음악 완성도에서는 오히려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수록 곡 중 70년대 초반 김세환을 위해 만들었다가 그의 활동 금지로 묵혀진 '행복한 사람'이 의외의 반응을 몰고 왔다. 기획자의 의견으로 수록한 그 곡은 30만장 판매의 일등 공신이었고 가수 조동진의 화려한 탄생을 있게 했다. 곧 바로 2집 ' 어느 날 갑자기-한국ㆍ1980'이 발표되었다. 이번엔 ' 나뭇잎 사이로'가 히트했다. 인기 가수로 떠오른 조동진은 81년 10월, 숭의음악당에서 ‘ 동방의 빛'이 연주를 맡고 송창식, 정태춘, 이정선, 이광조 등이 게스트로 출연을 해 감격스런 첫 단독콘서트를 열었다.

좋은 반응 속에 콘서트를 치러냈건만 그는 오히려 소극적인 활동으로 일관했다. 좀처럼 움직이기 싫어하는 그의 기벽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신비적인 음악 활동덕에 ' 교주'처럼 따르는 팬들을 생겨났다. 당시 서울 서초동 은하아파트 그의 집엔 김수철, 강인원, 양희은, 해바라기, 들국화,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등 기성 가수들 뿐 만 아니라 음악 지망생, 대학생 팬들이 수 십 명 씩 몰려 들었다. 그들은 요란한 말보다는 침묵 속에서 설득력 있는 진실한 목소리가 담긴 노래로 대중과 교감 하는 조동진의 음악 태도를 흠모했다. 이 때의 음악 동지들은 훗날 그가 하나뮤직을 근거지로 탄생시킨 ' 조동진 사단'의 모태가 됐다. ' 노래하는 시인'으로 불리기 시작한 그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대부가 되었다.

85년 1월, 5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3집 '슬픔이 너의 가슴에'를 발표했다. 그의 녹슬지 않은 창작력을 확인시켜준 명곡은 ' 제비꽃'이었다. 이후 86년 종로3가 미리내 예술극장 개관무대의 주인공이 된 그는 87년 12월 대중 가수로는 처음으로 호암아트홀에서 단독 공연을 열었다. 하지만 다음 앨범 발표는 또 다시 5년이란 긴 세월을 요구했다. 1990년 4집 ' 음악은 흐르고'를 발표하며 그 해 말, 계몽아트홀에서 단독콘서트 ' 겨울 조동진'무대를 마련했다. 4집 이후 조동진은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91년 말, 그 동안 발표한 앨범의 노랫말 35편을 묶어 시집 ' 우리같이 있을 동안에(청맥刊)'을 발표했다. 좀처럼 TV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는 92년 9월 SBS TV ' 쇼 서울 서울'프로의 ' 포크 가을 여행'이란 특집 프로에 출연을 했다. 사진 촬영의 재미에 푹 빠진 그는 음악 친구 조원익이 경영하는 논현동의 ' 하나음악'에서 음악 감독 역할을 했다. 정혜선 데뷔 음반 ‘오 왠지'와 하나 옴니버스 앨범은 그의 작품이었다. 이 당시 옴니버스 앨범에 참여한 최성원, 김광석, 장필순, 조규찬, 하덕규, 박학기, 이무하, 한동준 등 40여명의 후배 가수들과 경기도 가평에서 단합 대회를 가졌다. ' 조동진 사단'의 본격 가동이었다. 93년 3월엔 MBC TV ' 나의 노래 나의 인생'에서의 조동진 특집에 출연했다. 또 철거 위기에 놓인 야학을 돕기 위해 수원대를 시작으로 2달 동안 후배들과 함께 전국 40개 대학을 도는 순회 공연에 나섰다. 11월엔 ' 친구들에게' 등 신곡 2곡을 수록한 ' 조동진 베스트 노래 모음집'을 발표하고 12월에는 KBS 2 TV '양희은의 事?콘서트'에도 출연했다.

94년 5월, 종로5가 연강 홀 콘서트에 이어 12월에는 대중 가수에게는 좀처럼 무대를 개방하지 않았던 예술의 전당 무대에 최초로 오르는 쾌거를 이뤄냈다. 공연은 계속되었다. 95년 11월 대학로 라이브 소극장에서 일주일간, 96년 5월에는 6년 만에 발표한 5집을 발표회를 겸해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4일간 공연을 했다. 고정 팬 층이 두터워진 그의 공연들은 늘 전회 매진을 기록했다. 98년 3월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음악 30년을 결산하는 무대였다. 장필순, 더 클래식, 한동준, 권혁진 등과 함께 했다. 2000년 2월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단독공연 후, 그는 '하나음악'을 운영하는 데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초동 스튜디오를 처분하고 합정동을 거쳐 일산으로 이사를 했다. 특유의 운둔적 삶으로 돌아갔다.

2004년 1월 강남 LG아트센터. 4년 만에 그는 대중 앞에 나타난 그는 휴식 없이 연주를 하는 공연 컨셉으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 노래는 아름다워야 합니다. 작게는 음악적 기법이나 유행, 크게는 사회성이라는 것도 음악의 아름다움을 희생해서는 안됩니다." 조동진은 클래식만을 선호하던 호암아트홀,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LG아트홀 등의 무대를 두루 섭렵한 최초의 가수일 것이다. 시각적 감성을 도입해 격조 있는 대중 음악을 구사하는 그에 대한 합당한 평가였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7-22 18:17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