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삶을 노래한 짙은 감성의 허스카 보이스

[추억의 LP 여행] 임희숙(上)
굴곡진 삶을 노래한 짙은 감성의 허스카 보이스

긴 생명력의 가수 임희숙. 인기 정상의 가수라기보다는 최고의 가창력을 지닌 가수라는 표현이 합당한 가수이다.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그녀의 노래들은 절절한 호소력으로 솔, 트로트, 재즈, 가스펠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의 사랑의 받았다. 여자 가수의 인생치곤 고난이 많았던 지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여러 차례 활동을 중단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그 때문에 많은 히트 곡 보다는 범접하기 힘든 뜨거운 가창력으로 스스로를 대중음악사에 중요한 아티스트로 자리매김됐다.

‘ 진정 난 몰랐네’, ‘ 나 하나의 사랑의 가고’ 등 그가 남긴 히트 곡들은 지금도 중·장년층들의 사랑을 받는 불멸의 히트 넘버이다. 두 번의 결혼 실패와 대마초 사건, 그리고 병마와 싸우며 활동 중단을 거듭했던 평탄치 않은 삶의 여정을 지나온 그녀의 노래 속엔 아픔만큼 삶의 절절함이 배어 있다. 80년대 중반, 재기에 성공한 이 후 그녀는 방송 출연을 비롯해 각종 공연과 미사리 등 음악 카페에서 매일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짙은 허스키에 영혼을 울리는 그녀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흑인 재즈 가수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임희숙은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9일 태어나 조종순씨의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전쟁 중에 부친이 사망했기 때문. 재혼한 어머니는 두 명의 동생을 낳았다. 영화 ‘ 개같은 날의 오후’로 주목을 받았던 이민용 감독이 그의 친동생이다. 활달한 성격의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 외국 팝송을 많이 접했는데 특히 미국 흑인가수 샘 쿡(Sam Cook)의 노래에 푹 빠져 지냈다. 어린 그녀는 짙은 감성으로 사람의 영혼을 감싸주는 외국의 솔 가수들의 끈적끈적한 솔이나, 블루스 같은 흑인 재즈성향의 노래가 특히 좋았다. 노래에 관심이 많아진 그녀는 덕성여고 2학년 때인 1966년에 작곡가 손목인과 손석인으로부터 재즈를 배우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가수로서의 첫 무대는 워커힐이었다. 67년 데뷔 곡 ‘ 그 사람 떠나가며’를 발표하며 워커힐 무대에 이어 TBC TV의 ‘ 쇼쇼쇼’, ‘ OB카니발’, 동아방송 등 방송에 출연해 팝송을 주로 불렀다. 가창력을 인정받자 CM송까지 부르며 주목 받는 신인 가수로 착실하게 성장을 했다. 1968년 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바쁜 가수활동 때문에 학업을 병행하기 힘들어 1년이 못 되어 중퇴를 했다. 본격적인 음악 활동에 들어간 그녀는 독특한 소울 창법과 남자 같은 화통한 성격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조영남과 곧잘 비교되었다. 그래서 생겨난 별명이 ‘ 여자 조영남’. 외모를 비하했던 별명이었던지라 그녀로서는 달갑지 않았지만, 그만큼 대중의 관심이 증폭되었던 증거이기도 했다.

전우중의 곡 ‘ 그 사람 떠나고’를 받아 처음으로 음반을 낸 것이 1969년. 당시는 주류 대중 음악을 지배하던 트로트가 서서히 대중의 관심 밖으로 내몰리던 시기였다. 미 8군 무대를 기점으로 영입된 솔, 록, 포크 등 다양한 장르의 기세가 어느 때 보다 드셌기 때문이었다. 그 해에 미 8군의 ‘ 신중현 스페셜 쇼’에 출연한 임희숙은 음악적 코드가 통했던 한국 최초의 소울 가수 박인수 등과 음악적 교류를 했다. 이 때의 활동 때문에 임희숙은 ‘ 신중현 사단’에 간혹 포함이 되곤 하지만 사실 신중현의 곡을 부른 것은 군방송 드라마 주제곡 ‘ 슬픈 고백’ 등 그리 많지는 않았다. 임희숙의 넘치는 끼를 높이 산 신중현은 ‘ 님은 먼 곳에’ 등 자신의 곡을 임희숙에게 주려고 했지만, 이미 작곡가 김희갑으로부터 MBC드라마 ‘ 왜 울어’의 주제가를 받아 노래한 그녀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김희갑 휘하로 갔다. 그래서 김희갑곡‘ 진정 난 몰랐네-1970’를 부르게 되었다.

빅 히트가 터진 이 노래는 그녀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30여년의 세월을 초월해 지금도 소위 중장년층의 ‘ 18번’으로 뽑히는 이 노래는 그녀의 대표곡이 되었다. 또한 여러 가수에 의해 다시 불리거나 리메이크도 됐다. 그러나 솔 풍의 가요인 ‘ 진정 난 몰랐네’를 처음 불렀던 가수는 임희숙이 아니었다. 김상희였다. 하지만 1967년 맑은 음색의 김상희의 노래는 빛을 발하진 못했다. 임희숙의 호소하는 듯한 소울 풍의 끈적한 목소리는 3년이 지난 후에야 이 노래를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곡으로 되살려냈다. “ 사실 저도 노래를 부른 뒤 곧 바로 히트를 터트리진 못했고, 2년 정도 흐른 뒤 뜨기 시작했어요. 음악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알려진 경우입니다. 당시 키보이스가 반주를 했고, 한 번에 동시 녹음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트로트 작곡가인 박춘석과 손잡고 ‘ 잊어야할 사람’, ‘ 잊었을 거에요’(1971)를 발표해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71년 8월, 봉봉사중창단의 이계현이 운전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소울 가수로 이름이 난 그녀는 72년 8월, 싱가폴 건국기념 재즈페스티발에 한국 대표로 초청을 받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또한 ‘ 지난날’(1974), ‘ 돌아와 주오’, ‘ 믿어도 될까요’(1975) 등으로 꾸준히 자신의 음악적 위상을 이어갔다. 74년 2월,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나와 상업은행 본점에 근무하는 은행원 조성윤씨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혼인 신고도 하지 않은 채 5개월 만에 헤어졌다. 75년 11월, 임희숙은 종로5가 칠복여관에서 음독자살을 기도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건을 벌였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7-28 13:35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