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소스를 흠모한 아폴론

[영화되돌리기] 베니스에서의 죽음
디오니소스를 흠모한 아폴론

구제불능의 보헤미안이요 경박한 예술가였던 하인리히 만과 품행이 방정한 시민이요 귀족이었던 토마스 만. 이 두 예술가 형제는 파란만장한 독일의 역사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형 하인리히보다 먼저 성공한 소설가 반열에 오른 토마스. 그에 비해 그의 형 하인리히는 세계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여전히 곤궁한 무명작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는 빌헬름 황제 치하를 풍자하는 소설을 쓴 형 하인리히가 스포트 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다 토마스가 '마의 산'으로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이 둘의 끈질긴 라이벌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문학적 업적으로 형을 압도한 토마스 만은 사실 자유분방한 형의 삶을 부러워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성적 정체성(동성애 편향적인)을 드러낼 수 없었던 토마스는 광란의 사랑(이성애)을 대담하게 즐기는 하인리히를 경멸하면서도 동경했다. 토마스 만의 이러한 고뇌와 좌절은 그의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에서 엿볼 수 있다. 소설에서 토마스만은 정신이 창조할 수 없는 순수 관능의 육신에 사랑을 느끼면서도 오직 이성이 지배해 온 자신의 예술세계를 버리지 못해 혼란을 느끼는 소설가 구스타프 아센바하로 분한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영화 상에서는 소설가 대신 음악가가 등장한다. 도달할 수 없는 것을 동경하고 갈망한 예술가 구프타프 말러로 말이다.

하지만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예술가의 심오한 고뇌 대신에 예술가를 심란하게 만든 아찔한 육신에 초점을 맞춘다. 예술가의 정신을 병들게 할만큼 아름다운 그는 바로 이 영화가 낳은 신비로운 스타 비요른 안데르센이다. 영화는 패닝과 줌 인을 반복하며 미소년의 판타지같은 용모를 부각시킨다. 영화 내내 침묵하는 비요른은 창백한 얼굴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으며 주인공과 관객을 몽롱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때로는 살아있는 시체를 보는 듯이 간담이 서늘해지곤 한다. 에로스(관능)는 결국 타나토스(죽음의 본능)로 귀결되기 때문일까. 때로는 절대순수처럼 아름답고 때로는 사악한 악마처럼 치명적인 그는 예술이 지닌 모호한 두 얼굴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동료는 건강한 예술가는 건조할 뿐이며 천재의 양식은 타락과 사악함이라며 예술의 악마적 힘을 강조한다. 결국 디오니소스처럼 광기어린 광대로 분한 아센바하는 광란의 사랑에 기꺼이 빠져들 준비를 한다. 하지만 절대 미는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법.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그는 싸늘한 시체로 변한다.

아센바하는 디오니소스가 될 수 없는 불행한 아폴론이었다. 아센바하의 또 다른 분신인 토마스 만 역시 금욕적인 예술가라는 굴레에 갇혀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영혼이었다. 하지만 절제와 조화의 예술을 지향하든 광란과 일탈의 예술을 지향하든 간에 예술은 이들에게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신기루로 남아있다. 마약과도 같은 비요른 안데르센의 중독성 미소만큼이나 애매모호한 세계로.

정선영


입력시간 : 2004-08-25 15:53


정선영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