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 7색, 인생행로 달라도 음악사랑은 계속된다

[추억의 LP 여행] 작은별가족(下)
7인 7색, 인생행로 달라도 음악사랑은 계속된다

본격 활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부친은 매니저로 모친은 의상과 헤어 스타일을 돌보는 코디네이터 역할로 전환하고 7인조 보컬 그룹 ‘작은별’로 전환했다. 연주 포지션도 전문화를 꾀했다. 리드 보컬은 인봉과 애리자가 맡았다. 개성이 강했던 멤버들은 모두 별명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공학박사, 둘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셋째는 강고집, 넷째는 강삿갓, 다섯째는 잠꾸러기, 여섯재 애리자는 도널드, 막내 인봉은 못하는 것이 없고 안 끼는 데가 없다 하여 감초라 불렸다. 나이차가 컸던 지라 멤버들은 세대차로 인한 음악적 지향점이 달랐다. 첫째와 둘째는 노래의 상품성을 강조했고 넷째부터는 순수성을 중시해 격론이 빚어졌지만, 이때마다 셋째 강인엽이 중재자 역할을 했다.

1982년 12월, 새 앨범 ‘하소연’을 발표하며서 발라드에서 록까지 넘나드는 전천후 그룹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반년쯤 지나면서‘딱부러지게 말해’가 히트 차트에 올랐다. 또한 MBC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수요일 벼락 DJ 코너에 출연해 팬들의 관심을 모았다. 84년 6월말부터는 40여일 간 후꾸오카 등 일본의 10개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다시 열었다. 귀국후 작은별은 일본 공연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은 셋째 강인엽을 처음으로 리드 싱어로 내세웠다. 막내 강인봉은 과거에 솔로 가수 활동도 했지만, 성장을 하면서 어린이 가수 이미지를 벗지 못 하는 한계를 보였기 때문. 강인엽 또한 엷은 허스키로 ‘슬퍼하지 말아요’를 발표하며 정식 솔로 가수로 데뷔했다. 음악 활동 때문에 미뤄 두었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8년이나 뒤늦게 서울예전 방송연예과에도 입학했다.

85년 6월, 작은별가족은 강남구 신사동에 ‘작은별 문화센터’를 설립해 연예 산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강인엽의 솔로 독립, 강애리자의 결혼 문제 그리고 한양대 연극영화과 출신의 다섯째 인구와 고려대 신방과 대학생인 막내 인봉이 이영웅, 안영훈, 곽윤종과 함께 5인조 록 그룹 ‘벌거숭이’를 결성해 앨범을 발표하자 잠정 해체 소문이 나돌았다. 강인봉, 강인구가 주도한 록 그룹 벌거숭이는 비록 단 한 장의 음반을 남기고 해체되었지만 ‘삶에 관하여’란 곡은 록 마니아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룹 해체 이후 강인구는 MBC TV 베스트셀러극장의 여러 단편극에서 배경 음악 작곡가로 변신해 재능을 인정 받았다. 86년 그는 영화 음악에도 진출, 심재석 감독의 ‘뛰는 자 나는 자’의 주제가 ‘사랑 서리’를 강인엽에게 부르게 했다. 드라마, 영화 음악의 젊은 귀재로 평가 받은 그는 88년 6월 김응천 감독의 뮤지컬 영화 음악도 맡았다. 이후 강인구는 95년 한국방송대상에서 SBS TV 자연다큐멘터리 ‘버섯, 그 천의 얼굴’과, ‘아시아 4만km’로 최우상과 작품상을 수상하고 강남구 신사동에 녹음스튜디오를 열었다. 강인엽은 ‘침묵’등 신곡과 함께 동생 강인구에게 ‘모델 아담’, ‘ 바다의 이야기’등을 받아 두 번째 독집을 발표했다. 막내 인봉은 음악 활동을 접고 학업에만 전념했다.

당시 첫째는 컴퓨터회사에 취직했다. 둘째와 셋째는 작은별문화센터를 운영했고, 여섯째 강애리자는 한양여전 도예과 졸업 후 86년 10월 결혼과 함께 활동을 중단했다. 하지만 강애리자는 2년만에 신곡 ‘분홍 립스틱’을 발표해 KBS TV ‘가요톱10’10위권에 오르며 재기했다. 인기 가수가 된 강애리자 덕에 젊은 여자들이 분홍 립스틱만을 찾자, ‘분홍 립스틱’ 선풍마저 몰아 닥쳤왔다. 90년 고려대 신방과를 졸업 후 공채로 들어간 제일기획에서 오디오광고 기획일을 하던 막내 강인봉은 91년 1월 연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영파여중 교사 이지현과 결혼식을 올렸다.

92년 1월 작은별가족은 다시한번 화제가 되었다. 이번엔 아버지 강문수씨가 주인공. 그는 주연, 극본, 감독의 1인 3역으로 1년 6개월만에 영화 ‘어허 어이 어이가리’를 완성해 대종상 특별상을 수상했던 것. 강씨는 갱부 감독인 오감독역을 맡고 아내 주영숙과 친정부모와 맏아들 인호를 제외한 6명의 자녀들과 손자손녀 30명이 단역으로 참여하는 등 가족의 절대적인 지지속에 ‘3대가 만든 가족영화’로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한동안 직장생활에 전념하던 막내 강인봉은 회사에 음반 제작 오디오 파트가 생겨 사이버가수 류시아과 가수 김원준을 발굴해 그의 2, 3집 앨범제작에 참여했다. 그러다 음악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 해 오랜 공백을 깨고 94년 록 그룹 ‘벌거숭이’의 멤버였던 곽윤종과 테크노 듀엣 ‘키키’를 결성했다.

자신은 기타와 섹소폰, 일본 뮤즈음대에서 재즈 피아노를 전공한 곽윤종이 건반을 연주해 타이틀곡 ‘다른 모습’등 11곡의 퓨전 곡을 담아 앨범을 발표했다. 하지만 큰 반응을 얻지 못하고 97년 그룹 ‘세발 자전거’를 재결성해, 99년 1집 ‘꿈이었으면’, 2000년 2집 ‘세상살이’를 발표하는 등 독자적인 음악 기반을 다져 나갔다. 그 결과 2001년 남성 3인조 퓨전 포크 록 그룹 ‘자전거를 탄 풍경’을 결성하며 재탄생했다. 드럼, 기타, 하모니카 등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는 송봉주, 김형섭 등 자탄풍 멤버들의 맏형으로 활약하며 탄탄한 지지층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현재 일본 중국등 해외 진출을 꾀하며 쉼 없는 라이브 활동을 여전히 벌이고 있는 그는 ‘작은별 가족’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 가고 있는 셈이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9-14 18:21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