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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 여행] 쟈니리(上)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전쟁고아에서 극장쇼 스타로


정원, 트위스트 김과 더불어 1960년대 극장쇼의 인기 스타로 군림했던 쟈니리. 지금도 중년 세대의 애청 넘버인 ‘뜨거운 안녕’은 그의 대표곡. 또한 구전 가요로 알려졌던 ‘사노라면’의 오리지널 가수로 최근 밝혀지면서 재조명 받았다. 파란만장한 인생 역경을 지내 온 그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현역 재즈 가수로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그의 본명은 이영길. 중국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집을 나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부친 이태수와 모친 유관순의 외동아들로 외롭게 성장했다. 평탄치 못했던 가정사로 인해, 1938년에 태어 났지만 1942년 8월 29일에야 호적에 올랐다. 중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진남포 제련소를 다녔던 외삼촌의 집에 맡겨져 진남포 풍전 인민소학교를 5학년까지 다녔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1951년 1ㆍ4 후퇴 피난민들을 따라 홀로 부산으로 피난 갔다. 고아가 된 그는 부산 광안리 피난민수용소에서 덴마크 출신 미국인 랙스 무섬씨를 만났다. 자녀가 없던 부산의 항만 총책임자였던 랙스 무섬씨는 귀엽게 생긴 이영길을 예뻐 했다. 그의 집에 살게 되면서 대신동에 있던 서울대신피난초등학교 6학년으로 다시 들어갔다.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음악 소질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노래를 몇 번 들으면 곧바로 따라 부르는 재능을 보였다.

음악을 사랑했던 양아버지를 통해 외국노래와 영어를 배웠다. 바이브레이션이 빠르고 강한 액센트로 노래하는 이영길에게 양아버지는 당시 미국의 인기 가수 쟈니 매티슨과 닮았다며 ‘쟈니리’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양아버지의 집은 늘 정치인들의 파티가 열렸다. 넉넉한 집에서 살게 된 그는 잠시 동안 미제 공책, 연필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부러움 받는 아이가 되었다.

1952년 양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북 출신에다 정식 입양아가 아니었던 그는 밀항을 해야 했다. 미국 테네시주 현지의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유일한 동양인으로 인종 차별을 겪었다. 뉴욕에서 살 때는 차별을 참다못해 싸움을 벌여 뉴욕 불법 입국자 수용소로 끌려가 입국 불허 판결을 받은 뒤, 3개월 만에 부산으로 되돌아 왔다.

귀국 후 피난을 내려 온 서울사대부속중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1개월 만에 큰 병에 걸린 양아버지가 사망을 하면서 다시 고아가 되었다. 이후 행복산 고아원으로 들어갔지만 견디지 못하고 양아버지가 남겨준 추천장을 들고 부산 3부두에 있던 미국 배를 전전하며 1년을 살았다. 그는 뱃사람들이 즐겨 찾는 부두 옆 시맨스 클럽에 따라가 내킹콜의 ‘투 영’ 같은 팝송을 불러 귀염을 받았다.

16살이 되면서 초량동에 단칸방을 얻어 미제 담배, 비누, 과자를 구해 팔아 연명했다. 하지만 굶기를 밥 먹 듯 해 3기 폐결핵에 걸렸다. 뱃사람들에게 페니실린을 얻어 치료를 했지만 생을 포기했던 가혹한 시절이었다. 건강을 회복한 1958년, 연예인이 되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양복 세벌을 들고 무단 상경을 했다.

당시는 극장 쇼가 활발하게 시작되었던 시기. 스카라 극장 앞은 쇼 연예 단장들과 무명 가수들의 집합소였다. 어느 날 스카라 극장 조명 기사의 도움으로 ‘발라이데이 쇼’ 무대에 올랐다. 단장은 신창견씨. 그가 쇼 단체 ‘쇼 보트’를 창설하면서 단원이 되었다.

이 때가 1959년. 출연료는 없었지만 끼니 걱정을 덜은 그는 쇼 단과 함께 여수, 춘천, 이리, 군산, 부산, 대전 등 전국을 순회했다. 당시 쇼보트에는 안다성, 배삼룡, 백금녀, 현인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선후배 관계가 엄격했던 그 시절, 선배들 잔심부름을 하면서 냇 킹 콜, 폴 앵카의 노래를 들으며 창법을 익혔고 미 8군 밴드 마스터로부터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을 배워 나갔다.

1961년 쇼 보트가 미 8군 무대로 진출하면서 8군 무대 가수가 되었다. 영어가 능숙해 사회자로 나서기도 했다. 6개월간의 8군 가수 생활 후 음반을 발표하고 싶어 일반 무대로 나왔다. 그는 부산 영주동에 살아 던 트위스트김과 함께 단성사, 대한극장, 피카디리, 국제극장무대에 섰다. 무명 가수였지만 귀공자 타입의 외모를 지녔던 쟈니리는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주거가 일정치 못할 정도로 궁핍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무대에서는 11 차례까지 앵콜을 받으며 성장해 나갔다. 아시아레코드등 레코드회사에서 노래 취입 요청이 들어와 1964년쯤 영화 ‘공갈’의 주제가 ‘사랑의 청신호’등을 취입하며 정식 데뷔를 했다. 영화에도 몇 차례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당시 ‘허무한 마음’의 정원, 트위스트 김과 특히 친하게 지냈다. 60년대는 양복을 입어야 신사 취급을 받던 시기. 하지만 청바지에 청자킷을 즐겨 입고 다녔던 이들 삼총사는 양아치 클럽으로 불렸다. 극장 쇼에서 명성을 얻자 1966년, 신세기레코드에서 음반제의가 들어 왔다.

이 음반이 키보이스의 반주로 동시녹음한 스필릿음반. 지명길이 컨츄리 곡 ‘Oh, Lonesome Me’를 개사한 타이틀 곡 ‘오 우짤고’와 레이 찰스의 노래를 번안한 ‘사랑의 사슬을 풀어 놓고’가 히트를 했다. 부산 사투리 가사가 코믹했던 ‘오 우짤고’는 젊은 층 뿐 만 아니라 부산의 어린아이들에게 특히 인기를 끌었다.

음반 발표 이후 대중적인 인기가 높아진 쟈니리는 한달에 50만원이라는 거액으로 전속 계약을 맺었다. 당시는 150만원이면 집 한 채를 사던 시절이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 2004-09-2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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