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삶에 지친 천재소녀하이틴 스타에서 비운의 스타로

[추억의 LP 여행] 장덕(上)
굴곡진 삶에 지친 천재소녀
하이틴 스타에서 비운의 스타로


1990년 2월 4일. 스물아홉의 한 여자 가수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장덕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듯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였다. 항상 발랄한 이미지의 소녀 같았던 그녀의 죽음에 많은 대중이 의구심을 가졌다.

또한 6개월후 남매 듀엣 ‘현이와 덕이’로 함께 활동했던 오빠 장덕의 잇단 죽음도 충격이었다. 귀여운 보조개와 동그란 눈, 단발머리가 상징이었던 장덕에게는 아이돌 가수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하지만 이미 중 2때 진미령이 불러 빅히트한 ‘소녀와 가로등’을 작곡했던 그는 여성 싱어- 송 라이터가 드문 대중 음악계의 천재 소녀 뮤지션이었다.

장덕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첼리스트였던 아버지 장규상씨와 서양화가인 어머니 이숙희씨 사이에 1남 1녀 중 막내로 1962년 4월 21일 태어났다. 5살 많았던 장현은 동생에게 하모니카로 동요 ‘오빠 생각’을 연주해 줄 만큼 사이가 좋았다. 충무로 4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흥인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가 이혼을 해 전 가족이 흩어졌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뿐철학’이라는 동양 사상에 심취했던 아버지를 따라 도봉산의 사찰인 청기와집에서 1년간 살았다. 그 때 오빠에게 기타를 배웠다. 부친은 늘 집을 비웠고 남의 집 가정 교사를 했던 오빠 장현도 밤 늦게 들어와 장덕은 빈 집에서 기타를 치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어설프게 작곡을 시작한 이 때가 초등학교 6학년. 그녀는 창작은 물론 첼로, 피아노 연주, 그림과 글짓기에도 재능을 지닌 소녀였다. 노래를 잘 불렀던 그녀는 ‘누가 누가 잘하나’등 TV방송의 동요 경연 대회에 나가 1등 입상을 여러 번 했을만큼 음악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불우했던 가정사 때문에 당시 그녀의 곡들은 어둡고 쓸쓸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세 번이나 옮겨 다닌 후 1974년 서울사대부중에 입학했다. 사춘기가 되면서 더욱 우울한 성격으로 변해 급기야 수면제 10알을 먹고 음독 자살을 기도하고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가출도 했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당시 인기를 끌던 미국의 남매듀엣 ‘카펜터즈’처럼 오빠와 함께 남매 듀엣을 결성시켜 주었다.

처음 남매 듀엣의 이름은 ‘드래곤 랫츠’. 미 8군 쇼 무대에 출연해 통기타를 연주하자 곧바로 방송국 PD들에게 스카우트 되었다. 75년 5월 TBC TV ‘오라오라’에 출연해 창작곡 ‘꼬마 인형’을 부르며 최연소 남매 듀엣으로 일반 무대에 데뷔를 했다. 중3이 된 76년 4월. 자작곡 ‘친구야 친구야’ 등 3곡이 수록된 데뷔음반(오아시스)을 발표해 주목을 받으며 임현식 감독의 ‘마음의 행로’ 등 3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깜직한 외모의 장덕은 단숨에 하이틴 스타로 떠올랐다.

이듬해인 77년 안양예고에 진학했다. 그 해 진미령에게 ‘소녀와 가로등’을 주어 제1회 MBC 서울국제가요제에 출전했다. 당시 가요제 규정상 작곡가와 가수가 함께 무대를 꾸며야 했다. 그래서 여고생 장덕이 빵모자를 눌러 쓴 깜찍한 모습으로 나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이후 78년 장현의 ‘더욱 큰 사랑’, 79년 박경희의 ‘사랑이었네’, 80년 최병걸의 ‘사랑은 떠나도’ 등 3년 연속 출품한 곡이 모두 입상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작곡가로도 유명해진 장덕은 영화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당시는 하이틴 영화 열풍기. ‘우리들의 고교 시대’, ‘선생님 안녕’ 등 1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 음악도 여러 편 작곡했다.

그녀는 고교 졸업 때 까지 자신을 짝사랑한 팬들에게 다섯 번씩이나 납치를 당했을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가는 곳마다 밀려든 팬들의 사인 요청이 이어졌다. 이후 장덕은 솔로로 독립하고 장현은 록 그룹 ‘현이와 거룩한 성’을 결성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재혼 후 갈등을 겪으며 가짜 중과 가출했다는 소동을 빚고는 동맥을 끊고 또 다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여러 사건에 휘말렸던 79년 10월 친 어머니가 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처음 델몬트 칼리지 음악과에 입학, 어학 연수를 겸해 한 학기를 마친 뒤 테네시 주립대로 옮겨 2년 간 작곡 공부에 전념했다. 이 때 내쉬빌 작곡가협회에 가입하고 한인 기독교방송에서 ‘한국인의 샘터’라는 프로의 MC로 1년간 활약을 했다. 하지만 유학 시절 향수병에 시달려 빠져 든 전자 포커 게임으로 등록금을 날리기도 했다.

그 때 자신을 아껴준 이모씨와 81년 10월 미국 내쉬빌에서 결혼을 해 가족 보컬 그룹 ‘리 패밀리’를 결성해 활동했다. 한인회의 각종 행사에 출연 하면서 서울에서의 화려했던 가수 생활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결국 삶에 대한 번민으로 이혼을 하고 83년 10월 귀국을 했다. 귀국 후 한남동에서 자취를 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잊혀진 가수였기에 어렵게 3년간 1,000만원의 계약으로 서라벌레코드에 전속이 되었다. 발표한 첫 앨범은 어머니 몰래 귀국했던 당시의 심경을 담은 <날 찾지 말아요>. 영화<수렁에서 건진 내 딸>의 음악 작업을 맡는 등 재기했지만 3년간의 공백은 컸다.

밤 늦도록 거리를 방황한다는 동생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울산에 살던 오빠 장현이 상경해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했다. 85년 이들은 재결성 기념 음반을 발표했다. 다행히 수록곡 중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 ‘날 찾지 말아요’ 등 예전의 히트곡들이 좋은 반응을 보이자 용기를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음악적 견해가 달랐던 남매는 1년만에 듀엣 활동을 중단하고 각각 솔로로 나섰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10-13 11:43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