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내림'의 탁월한 재능 미8군 출신 전성시대 열다

[추억의 LP 여행] 현미(上)
'집안 내림'의 탁월한 재능 미8군 출신 전성시대 열다

가요계의 통 큰 여자 현미. 파워풀하고 걸쭉한 허스키 보이스로 노래한 ‘밤안개’는 그녀의 대표 곡이다. 1961년 한명숙의 ‘ 노란 샤스의 사나이’에 이어 62년 그녀의 ‘밤안개’는 미 8군 출신 가수들의 전성 시대를 활짝 열어 젖혔다. 그의 음악 인생에서 작고한 유명작곡가 이봉조는 절대적인 존재다.

혼인 신고도 없이 20년 가깝게 살았다는 사실만으로 현미 - 이봉조 커플은 드라마틱하고 애틋한 갖가지 사연을 풍성하게 남겼다. 이봉조 사단의 대표 가수 현미는 격동기를 거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가수다. ‘ 만남’으로 유명한 가수 노사연이 그녀의 친조카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현미의 본명은 김명선. 1938년 1월 21일 평양 박구리의 평범한 집안에서 2남 6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녀는 우량아대회에서 입상한 건강한 아이였다. 노래와 춤에 재능이 있었던 자매들은 가정 주부였던 어머니 박영빈씨 보다는 아버지 김진일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평양에서 해산물 도매상을 했던 부친은 OK레코드사 콩쿨대회에 나가 1등을 했던 가수지망생이었다.

김명선은 어려서부터 노래와 춤을 곁들인 연극으로 동네에서 인기가 높았다. 1944년 평양 경림보통학교에 입학해 소년단 단장으로 활약했다. 학교 대표로 평양시청 앞에서 열린 공산당 환영 행사에 참여해 김일성에서 헌화를 하기도 했다. 정의여중에 입학한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UN군이 평양에 입성했을 때 금천대좌 극장에서 열린 평양 시민들과 국군들을 위한 잔치가 열렸다.

찬양가만 배우며 자랐던 지라 처음으로 대중가요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 국군의 철수 때 그녀의 가족은 피란민의 대열에 끼어 고생끝에 대구로 내려갔다. 이 때 두 여동생과 헤어지는 아픔이 있었다. 춥고 배고픈 이 시절, 남동생과 함께 남산동 염매시장에서 가래떡장사와 낙하산으로 만든 여자 속옷 장사를 했다. 연합중학교 2학년에 편입한 그녀는 김백봉 무용연구소에 들어가 대구 제일극장에서 열린 오페라 ‘을지문덕’에 동자 역으로 출연을 했다. 그 인연으로 꽃초롱 오페라단원이 되었다.

피난 시절 대구에서는 엄토미와 현인의 쇼 그리고 희망가극단의 가극 공연이 인기가 높았다. 희망가극단에서 일하는 친척 언니의 주선으로 단원이 되어 3개월간 지방 순회 공연에 따라 다녔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허락도 없이 가출한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겁이나 악극단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하지만 오빠에게 잡혀 대전으로 이사한 집으로 내려가 대전 종합 학교 여고생이 되었다. 공부보다는 무대에 오르고 싶었던 김명선. 언니의 김화선 무용 연구소에서 조교 생활을 하며 여고 시절을 보냈다. 가정 형편도 나아지면서 덕성여대 가정과에 입학해 서울 가회동 이모 집으로 올라왔다. 이 때 김진걸 무용연구소에서 발레를 배웠다. 당시 미 8군 쇼의 인기 스타였던 김씨스터즈가 함께 무용을 배웠다. 그 인연으로 이난영이 단장으로 있던 미8군 무대의 KPK 김씨스터즈 쇼에 무용수로 취직이 되었다.

첫 무대는 작곡가 김희조가 군악대장으로 있던 후암동의 제2군악대 쇼 무대. 여의도 장교 클럽에서 공연이 있던 어느 날, 솔로 가수로 활동하던 이대생 두 명이 모두 결근을 했다. 무대 대기실에서 현인의 노래를 부르던 김명선의 노래 실력을 기억했던 트럼본 연주자 이윤씨의 제안에 따라, 대타로 무대에 올랐다.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 ‘ 아, 목동아’, ‘ 베사메 무초’를 열심히 불렀는데 의외로 세 번의 열광적인 앙콜이 터져 나왔다. 다음날, 소문을 들은 스윙스타의 악단장 박인순이 집으로 찾아와 가수로 나설 것을 제안했다. 무용가를 꿈꿨던 지라 고민끝에 3인조 여성 보컬 그룹 현시스터즈를 결성했다.

멤버는 김명선, 김정애, 현주. 두 명이 김씨성이었지만 김시스터즈와 구별을 하기 위해 희귀성인 현주의 성을 따‘ 현시스터즈’로 그룹명을 정했다. 김명선은‘벨라’라는 예명으로 미8군내에서 제법 인기를 끌었다. 당시 미 8군 최고의 인기 가수는 곽순옥, 노명애, 페기 리, 이인숙이었고 스윙 스타의 최대 라이벌은 최초의 댄스 가수로 록큰롤을 부르며 무대에 드러누워 노래하는 파격적인 매너로 인기를 누린 미스K였다.

최희준, 한명숙도 비슷한 시기에 미 8군무대에 데뷔를 했지만 일반 무대는 먼저 진출을 했다. 이후 현시스터즈는 미 8군 50여개 쇼단 중 인기가 높았던 뉴앤뉴 쇼단에 스카웃되었다. 단장은 인기가수 박정운의 아버지 박일양.

‘현미’라는 예명은 은성살롱에 현시스터즈가 특별 출연을 하면서부터 사용했다. 당시 최고 가수였던 현인을 따라, ‘현’자 돌림의 예명을 갖자고 결정해 즉석에서 김정애는 현애로, 김명선은 현미로, 현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 곳에서 이봉조와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당시 이봉조는 김광수 악단의 테너색소폰 연주자. 그 후 퍼스트 나이터스 쇼단의 리드 싱어로 스카우트되었을 때, ‘ 서머 타임 쇼’ 밴드마스터로 영입된 이봉조와 재회 했다. 그들의 연예 사연 한 토막. 미 8군 무대가 쉬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두사람은 눈 내리는 남산의 오솔길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인근 주택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흘러 나왔다.

당시 흥이 오른 이봉조가‘고엽’을 연주하는 모습에 현미는 넋을 잃었다. 얼마 뒤 두 사람은 1960년 3월 25일로 결혼 날짜까지 잡으며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봉조는 자식이 셋이었던 유부남. 맺어질 수 없는 사이였지만 두 사람은 음악을 인연으로 가난한 시절을 함께 이겨 내며 사랑을 키워 나갔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10-27 11:31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