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주의로의 위험한 회귀

[영화 되돌리기] 영웅
중화주의로의 위험한 회귀

중국 윈난성을 여행할 때의 일이다. 조선족 가이드를 따라 민족촌(중국 내 소수 민족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관광 마을)을 방문하게 됐는데, 그 곳에서 세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우선 소수 민족의 수! 중국 내에 현재 이족, 묘족, 나시족, 토가족, 장족을 비롯해 무려 55개 소수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두 번째는 이 55개 소수 민족이 고작 중국 전체 인구의 8%를 차지한다는 사실이다(92% 이상은 바로 한족). 마지막은 이 8%가 무려 중국 영토의 60%를 차지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들은 중국 내에서 소수 민족의 분리 독립이 얼마나 중차대한 문제인지 말해 준다. (이들이 분리 독립하면 단숨에 국토의 60%가 떨어져 나가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중국의 소수 민족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최근 불거져 나온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만 보더라도 소수 민족 포섭책의 일환으로 ‘하나의 중국’ 사상을 고취시키려는 노력이 결국 역사 왜곡으로 이어졌음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강력한 중화주의에 빠져들고 있는 중국. 지난 해 개봉한 영화 속에서도 이들의 이러한 위험한 역사 의식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제목부터 거창한 영화 ‘영웅’이다. (감독은 ‘붉은 수수밭’인데, ‘홍등’에서 중국 역사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 5세대 영화 감독 장이모우의 작품이다. 그런 그가 중화민족주의 색체가 가득한 영화를 제작했다는 사실은 사뭇 놀랍다.)

‘영웅’은 2,000년 전 전국 7웅이 패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7웅 가운데 가장 위세 당당한 진나라 왕 영정이 전국 시대의 혼란을 평정하기 바로 직전의 이야기다. 이 진나라 왕 영정은 다름 아닌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운 진시황.

천하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진시황은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객들이 들끓자 옥좌 주위 100보 금지령을 내리며 신변 보호를 강화한다. 그리고는 위협적인 자객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수배령을 내린다. 이 때 황제를 암살하려는 쿠데타 세력을 잠재우고 진시황 앞에 나타난 무명 자객이 있었으니, 이제부터 영화는 이 무명 자객의 무용담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제목에 나오는 ‘영웅’은 황제 암살 세력을 제거하고 나선 이 무명 자객일까? 아니면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고 한 암살단들인가?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결국 영웅은 천하를 통일하고야 마는 진시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황제를 죽일 수도 있는 결정적 순간에 자객들을 주저하게 만드는 두 단어, 바로 ‘천하(天下)’ 때문이다.

‘천하통일’이라는 대의 앞에서 암살을 포기하고야 마는 자객들에게 진시황은 통일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사사로운 감정으로는 내 가족을 죽인 살인자지만 대의적 차원에서는 국가와 역사의 영웅이란 얘기다. 그런데 진시황에 대한 이러한 예우는 영화 속 일만은 아니다.

만리장성과 분서갱유 사건으로 우리에게는 폭정과 탄압을 일삼는 위정자 정도로 여겨지는 진시황제는 중국인들에게 의미가 깊은 위인이다. 중국인들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지금과 같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를 세우게 됐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차이나’가 진나라의 진에서 유래됐다고도 말할 정도니 말이다.

영화 속에서 여섯 나라와 더불어 기타 소국들까지 통일해야 하지 않겠냐며 원대한 천하패권의 이상을 다짐하던 진시황제. 이런 진시황제의 유령이 지금 중국을 떠돌고 있다. 영화 ‘영웅’은 소수 민족을 비롯한 주변국들에게는 하나의 위협을 예고하는 게 아닐까.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11-17 15:55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