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남자에 얽힌 욕망의 실타래

[영화 되돌리기] 나쁜 교육
네 남자에 얽힌 욕망의 실타래

‘사랑은 사회가 처벌하는 어떤 것’. ‘은밀한 생’의 작가 키냐르는 사랑이란 무엇보다 반사회적이라고 말한다. 그 옛날 칼로 자명고를 찢어 조국보다 사랑을 택한 낙랑공주나 금지된 사랑의 주인공인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은 때때로 사회나 가족을 배신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성이 허락하지 않는 욕망 때문에 이 세계에 고하는 하직인사하게 되어 버리기도 하는 사랑. 하지만 누구나 세계로부터 완전한 추방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연인들은 자신의 사랑을 들킬세라 은밀한 사랑을 즐기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연인이란 언제나 은밀한 공모자요, 사회의 사각 지대에서, 세계의 모퉁이에서 살아가는 자다. 세상의 모든 사랑 이야기가 통속적으로 비극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사랑의 본질 때문이다.

남녀간 사랑의 본질이 이러한데 동성간의 사랑은 얼마나 처절할까? 이들의 사랑이야말고 도덕이 금지하는 쾌락이요, 성의 방종이라고 낙인 찍힌 욕망이다. 이 때문에 사회는 쉽사리 동성애와 타협하려 들지 않고 이들 역시 대부분 자신들의 욕망을 학대하거나 은밀하게 즐기며 살아간다. 그런데 요즘 동성애를 다룬 영화들은 동성애와 이성애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입장을 취하곤 한다.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이 영화는 이성애자들이 자연스레 동성애에 빠져드는 과정을 경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나쁜 교육’ 역시 이성애와 별다를 것 없이 열정적이고 때로는 집착적인 동성애를 보여준다. 다만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와 다른 게 있다면 미스테러 스릴러적이면서 보다 농밀하게 요염하다는 데 있다.

영화 감독 엔리케와 친구 이나시오. 이 둘은 어린 시절 함께 신학교를 다니며 우정을 넘어선 사랑을 나누는 사이다. 그런데 이나시오의 미성숙한 육체와 천상의 고운 목소리를 흠모한 마놀로 신부가 이 둘 사이를 질투하면서 이들은 헤어지고 만다. 이나시오를 탐닉하고픈 욕망을 이기지 못한 마놀로 신부. 그리고 마놀로 신부로 인해 혼란스런 성 정체성을 갖게 되는 이나시오. 이 둘의 이러한 어긋난 욕망은 이후 일어나는 모든 비극의 단초가 된다.

영화는 20년이 지나 성인이 된 엔리케와 이나시오가 재회하는 데서 시작한다. 앙겔이라는 가명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이나시오는 엔리케에게 시나리오를 한 권 건네고 영화화 하기를 제안한다. 영화의 내용은 신학교에서 신부에게 성적으로 농락당한 한 소년의 이야기.

하지만 배우 선정으로 둘은 말다툼을 하고 그러는 사이 엔리케는 이나시오의 감춰진 이야기를 알게 된다.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이나시오의 삶과 이나시오인 척 하며 시나리오를 들고 엔리케 앞에 나타난 남자 후안의 정체. 그리고 아직까지 이들의 삶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마놀로 신부의 근황까지.

영화는 결코 성적으로 불온한 사제를 비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영화는 쉽게 말해 네 남자에 얽혀 있는 욕망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금지된 욕망에 사로잡힌 마놀로 신부, 왜곡된 욕망의 희생자가 된 이나시오, 아슬아슬하게 욕망에 탐닉하는 엔리케, 그리고 질투라는 이름의 욕망으로 비극을 잉태하는 후안까지. 이들의 관계 속에서 동성애 코드를 굳이 거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들은 단지 잘못 된 사랑으로 집착하고 실패한 사랑으로 증오하며 어긋난 사랑에 질투하는 필부(匹夫)들일 뿐이다.

감독이 동성애를 통해 이토록 과잉의 욕망을 드러내고자 하는 건 왜일까? 아마도 말 그대로 ‘나쁜 교육’을 해 왔던 프랑코 정권 하에 억압되었던 욕망을 속시원히 분출하고자 함이 아닐까? 하지만 억압된 욕망은 분출되면서 동시에 미친 듯이 파괴력을 발휘한다. 영화 속 네 가지 욕망이 결국 서로에게 생채기를 냈듯이 말이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12-17 10:11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