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음악계를 뒤흔든 파격10대들의 우상으로 떠오르다

[추억의 LP 여행]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上
주류음악계를 뒤흔든 파격
10대들의 우상으로 떠오르다


1992년 3인조 남성 랩댄스 트리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대중 음악의 기존 질서를 뒤흔들며 신세대 문화의 기폭제가 됐던 하나의 사건이었다. 불가능한 장르라고 여겨졌던 랩 댄스 뮤직의 충격은 강렬했다. 이어 400만장이상이 팔려나간 넉 장의 앨범은 97년 삼성경제연구소에 의해 역대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평가받았다. 서태지는 성공적 기업 경영의 모델로까지 응용되었다.

하지만 처음엔 평론가들의 혹평 세례를 감수해야 했다. 서태지는 아이돌 가수의 이미지에 매몰되기보다는 파격적인 가사와 다양한 음악적 실험으로 변화를 갈망했던 가정, 학교 생활에 기가 죽은 청소년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그는 단순한 대중가수가 아닌‘문화 대통령’의 권좌에 올랐다. 또한 10대들을 대중 음악 산업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시킨‘서태지 신드롬’은 90년대의 사회 문화 현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리더 서태지(본명 정현철)는 1972년 2월 21일 부친 정상규씨와 모친 강명수씨의 1남1녀 중 막내로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났다. 재동초등학교를 거쳐 재동중 시절 선생님들에게 구타를 당하면서 제도권 교육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그의 표현대로 “가출을 밥 먹듯이 하는 날라리 생활”을 시작했다.

중 2때 베이스 기타를 구입하며 작곡을 시작한 그는 록 그룹 하늘벽의 멤버가 되었다. 서울북공고 1학년때 대학 진학을 시간 낭비로 판단, 학교를 중퇴한 그는 언더 록그룹‘활화산’의 멤버로 활동했다. 17살때인 1988년, 우연히 신중현이 운영하는 라이브 카페 우드스탁무대에 섰다. 이 때 그의 연주를 지켜본 신대철의 권유로 록그룹 시나위의 4기 멤버가 되었다.

서태지라는 예명은 자신이 좋아하는 글자를 조합해 당시 작명했다. 귀여운 외모의 서태지는 콩쥐언니, 미키마우스, 서크루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90년 시나위 해체 후 컴퓨터 음악에 몰두하면서 새로운 음악을 펼칠 야심을 품기 시작했다. 91년 가을, 댄서 양현석과 이주노(본명 이상우)와 함께‘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했다.

92년 3월 데뷔 음반 발표와 더불어 공개적으로 신인가수들의 음악을 평가하는 MBC TV '특종! TV연예’프로에 첫 출연했다. 10대 관객들의 호평과는 달리 평론가들과 당시 정상의 가수였던 전영록은“리듬은 좋으나 멜로디가 빈약하고 모험적”이라며 60점을 밑도는 낙제점을 주었다. 기성 세대의 반응도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랩과 일명 회오리춤으로 무장된 데뷔곡‘난 알아요’는 발매 3주만에 30만장이 팔려나갔다.

새로운 것에 목말라 하던 10대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 스스로 프로듀싱, 엔지니어링, 작사, 작곡 및 편곡을 도맡았던 탁월한 음악성의 리더 서태지는 댄스 뮤직은 음악성이 떨어진다는 편견마저 불식시켰다. 순식간에 주류 음악이던 발라드와 트로트가 랩 댄스 뮤직에게 천하를 양보했다.

이에 정식 데뷔 3개월만에 1억5,000만원에 계약을 맺고 해태제과의‘캔디아이스’CF모델로 등장하고 각종 가요 인기 차트 정상을 석권하는 등 서태지 신드롬이 불기 시작했다. 이에 MBC TV는‘서태지와 아이들’을 다큐멘터리‘인간시대’의 주인공으로 소개했다.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그들의 몸짓, 말짓, 옷차림은 관심의 표적이 되었다. 상표를 부착한 옷을 그대로 입은 독특한 의상은 곧바로 10대의 유행 패션이 되었다. 대입 준비에 한창인 학원가에서도 수업중에 강사가 학생들에게“알겠냐”고 물으면 여기저기서 랩을 부르듯‘난 알아요’라고 대답했을 정도. 하지만 과중한 활동에 대한 이견으로 매니저와의 결별한 데 이어 이주노의 맹장 수술로 활동을 중단했다.

당시 이주노가 입원했던 구로동 성베드로병원 주위는 몰려든 청소년팬들로 인해 일대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다. 올림픽공원 제1경기장의 첫 공연은 그들의 위상을 재확인시켜주었다. 뉴 키즈 온 더 블록 내 한공연때의 사고 때문에 경찰140여명이 동원된 이날 공연에는 1만2,000여명의 10대팬들이 몰려 들었다. 눈물을 흘리고 기절하는 여학생들이 속출했던 이날 공연은 입장권 구매 행렬이 1㎞이상 장사진을 이뤘다. 공연 후 일본 도시바EMI와 음반 계약을 맺기 위해 동경으로 건너갔다.

일본니혼,아사히,NHK에 출연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일본 전국의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하지만 2억8,000만원이라는 국내 최고의 판권 계약으로 화제를 모았던 뮤직 비디오는 저작권 분쟁에 휘말렸다. 일본 공연 실황을 허락도 없이 불법으로 제작했던 한덕엔터테인먼트 등 쏟아져 나오는 수준 이하의 불법 비디오 때문에 한 동안 고통을 겪기도 했다.

92년말 서울가요대상, 오늘의 스타상, 골든디스크상 등 언론에서 수여하는 모든 가요관련상을 휩쓸어 폭발적 인기를 과시했다. 하지만 활동에 박차를 가하기는 커녕 2집 앨범 제작과 재충전을 이유로 시한부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활동 중단 선언은 새 앨범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93년 6월 레게 리듬과 록, 힙합에 국악을 접목시킨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담은 2집‘하여가’를 발표했다. 신비주의적 홍보 전략은 앨범 발매 첫날 30만장이 팔려나가는 신화를 탄생시켰다.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 2집은 매진 행진으로 일부 중고등학교에서는 레코드사에 단체로 직접 주문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타이틀곡‘하여가’는 93년 최고인기곡으로 선정되며 기존의 10대팬층을 40대까지 넓히는 성과를 일궈냈다. 하지만 레게 음악 분위기를 위한 이주노의 흑인풍 헤어 스타일은‘청소년들에게 악영양을 끼친다’는 이유로 KBS TV로부터 출연 정지 결정을 유도하며 더욱 화제가 되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5-01-12 11:41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